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년; 명종 18∼선조 22)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강릉(옛 지명은 임영(臨瀛)) 초당리에서 태어났다.
난설헌은 호,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다.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엽(許曄, 호: 초당(草堂))이고,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이다.
8세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으로 불렸다.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고, 15세 때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다.
남편과의 불화, 친정 식구들의 갖은 불행 등 화의 고뇌를 시작(詩作)으로 달랬다.
27세에 생을 마쳤다.
난설헌보다 15세 위였던 큰오빠 허성(許筬, 1548-1612)은 이조.병조판서를 지냈다.
작은오빠 허봉(許봉, 1551-1588)은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임금에게 직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허봉은 1583년 율곡 이이의 잘못을 고하다가 귀양 갔다.
3년 후 방면됐지만 술로 몸을 망치고 38세 때 객사했다.
동생 허균(許筠, 1569-1618)은 난설헌보다 여섯 살 아래로 형조.예조판서를 지냈다.
총명하고 막힘이 없었으며 개혁의식이 뚜렷했다.
허균은 봉건적 사회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소설 '홍길동'을 썼다.
50세 때 역적의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다.
형제들은 모두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났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 불행하게 죽었다.
난설헌은 15세쯤에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남편은 김성립(金誠立)이었다.
그의 집안은 5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
김성립은 허난설헌보다 한 살 위였다.
허균은 김성립을 "문리는 모자라도 글을 잘 짓는 자"라고 평했다.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부부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고부간 갈등도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부간의 갈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남편 김성립이 접(接: 글방 학생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에 독서하러 갔다.
난설헌은 남편에게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 (古之接有才, 今之接無才)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즉 '파자(한자의 자획을 분합해 맞추는 수수께끼)'를 사용해서 '지금의 접은 接에서 才자가 빠진 妾(여자)만 남아있다'며 방탕하게 노는 남편을 꾸짖었다.
난설헌의 외모는 뛰어났고(佳人; 이덕무 청장관전서), 성품도 어질었다(賢; 허균의 학산초담)고 한다.
난설헌은 아주 많은 책을 읽었고, 아주 많은 작품을 썼다.
글을 쓸 때에도 생각이 마치 샘솟듯 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허부인난설헌집 부경란집)
남편과 불화, 친정집안의 지리멸렬 등 난설헌의 생은 불행 그 자체였다.
그의 시 약 213수 가운데 128수가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심정을 읊은 신선시(神仙詩)였다는 것도 이를 방증 한다.
작품의 일부는 그의 동생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으로 간행돼 격찬을 받았다.
난설헌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
그러나 딸을 먼저 잃고 다음 해에 아들을 잃었다.
난설헌이 21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난설헌은 1589년 3월 19일, 27세로 요절했다.
그녀의 작품들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遊仙詩)' '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 '망선요(望仙謠)' '동선요(洞仙謠)' '견흥(遣興)' 등 총 142수가 있고, 가사(歌辭)에 '원부사(怨婦辭' '봉선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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