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편지-대입 복수지원 허와 실

입력 2004-01-16 09:13:20

최근 법조계 사람들을 우연히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법시험 이야기를 하던 한 검사는 "요즘 대학 후배들 수준이 너무 떨어졌다"며 툴툴거렸습니다.

곧이어 만난 한 판사는 "몇 년 사이 대구에까지 임용되는 대학 후배가 많아졌다"며 놀라워했습니다.

각각 서울대 법학과와 고려대 법학과 출신인 두 사람의 후배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이유는 얼마 전 발표된 45회 사법시험 합격자 분포를 보면 얼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체 합격자 905명 가운데 서울대 법학과 출신이 183명이고 고려대 법학과 출신이 152명입니다.

앞서의 판사는 "300명을 뽑던 시절만 해도 서울대 출신이 100명 이상인 데 비해 고려대 출신은 50명 안팎이었다"고 했습니다.

사법시험 선발 인원이 늘어났으니 여타 대학 합격자가 느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지적도 일면 타당합니다.

그러나 대학입시를 살펴보면 변화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지난 93년 수능시험이 실시되고 복수지원이 허용되면서 수험생들의 대학 지원은 종전의 본고사, 학력고사 때와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서울대 법학과나 경영학과 합격이 다소 불안한 수험생이라면 그보다 조금 낮은 점수대의 서울대 다른 학과에 지원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무조건 서울대가 최고라는 인식이 지배하던 시절이었죠.

그런데 취업난이 심각해지면서 수험생들은 대학보다 전공 위주로 지원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울대 인문.사회계열 하위학과 수준에 머물던 고려대 법학과나 연세대 경영학과의 지원 가능점이 최근 들어서는 서울대 법학과 바로 다음에 놓입니다.

입학생들의 수준이 높아지니 사법시험 합격자가 늘어나는 건 자연스런 일이겠죠. 이는 비단 법학과나 경영학과만의 상황이 아닙니다.

자연계열에서 대표적인 게 의대입니다.

마찬가지로 서울대 의대 합격이 만만찮은 수험생도 일단 서울대 의대에 지원하고 여타 대학 의대에 지원하는 게 보편화했습니다.

이제는 중위권 대학 의대조차 서울대 이공계열보다 합격선이 높아졌습니다.

지난해는 전국 모든 의대가 미어터지는 상황에서 서울대가 추가모집 공고를 내는 낭패까지 겪었습니다.

이런 변화를 교육계에서는 '대학 서열' 중심에서 '전공 서열' 중심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합니다.

복수지원이 결정적인 뒷받침을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대학 서열화를 타파하고 수험생들의 지원 기회를 늘린다는 복수지원제 도입의 취지는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인기 전공 중심으로 지원이 몰리다 보니 대학들의 색깔이 없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포항공대나 KAIST 같은 몇몇을 제외하면 대학마다 경쟁력 있다고 자랑할 만한 학과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현실입니다.

대학의 학과 하나하나가 국가의 미래나 사회의 소용을 반영해 생겨난 것일 터인데 인기 있는 학과, 특히 돈벌이에 유리한 학과에만 우수한 인재들이 몰린다면 국가 전체의 미래는 암울하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최근 수험생 수보다 대학 입학 정원이 많아져 하위권 지방 대학은 물론이고 중위권 대학 비인기학과들조차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을 보면 걱정은 더해집니다.

이를 고려한 듯 요즘엔 정부가 적극 나서서 이공계 우대라느니, 기초 학문 육성이라느니 호들갑을 떨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학은 너무 침잠해 있다는 평가입니다.

수험생들의 선호에서 멀찌감치 밀려났음에도 학과 구성원들은 과거 대학 서열이 중심이던 때만 생각할 뿐 원인을 분석하고 타개책을 만드는 데 그다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래 사회를 전망하고 학과의 비전을 그에 맞춰 학생들을 끌어들이고 미래의 인재로 만드는 일에 별 관심이 없는 모습입니다.

'대학이 변해야 국가가 산다'거나 '철밥통이 깨져야 개혁도 가능하다' 는 얘기가 참으로 가깝게 느껴지는 시기입니다.

김재경기자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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