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좋아한다'고 하면 '유별나다'는 말을 듣곤 한다.
겨울에 태어나서 그럴 거라는 말도 맞는 것 같다.
사실 어떤 추억에 기댄 정서 때문이거나 남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비교적 겨울에 쓴 작품이 많은 것도 어쩌면 생래적인 이끌림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을 해본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눈의 이미지(겨울)에 마음이 끌려 뽑아들었던 황동규 선생의 세 번째 시집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과의 만남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얼음의 비밀'과 같이 유난히 꽝꽝한 겨울 풍경과 그런 이미지로 가득 찬 사랑의 시들 때문이었다.
그 중에도 '성긴 눈'이나 '함박눈'이 내리는 정경의 묘사는 아름다운 언어들로 꽉 짜여져 있을 뿐 아니라 시인이 거느리고 있는 의식의 명징성과 예리한 환기력 등이 돋보이면서, 나를 새롭게 일깨워 주던 기억들도 생생하다.
영화 에서, 한번도 편지를 써 보지 않은 남편이 죽음을 앞두고 아내에게 읽어준 시로 더욱 널리 사랑을 받고 있는 '즐거운 편지'는 감동적이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이라는 표현은 전율을 안겨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런가 하면,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寄港地 1')는 묘사나,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조그만 사랑노래')이라는 인식은 눈이 의식의 꽃, 정화의 투명한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음도 느끼게 했다.
이 시집을 낼 무렵 청년이었던 시인은 우리가 약소민족임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유학 중이던 영국의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소년들과 거대한 공원의 모습에서 그런 깨달음과 마주친 시인은 '칼날처럼 벗은 우리 조국'('낙법(落法)')을 생각하면서 눈 속을 걸었다고 노래하고 있다.
"봉준(琫準)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왕 뒤에 큰 왕이 있고/큰 왕의 채찍!/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포(砲)들이 얼굴 망거진 아이들처럼 울어/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시인은 무심히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일자 무식의 혁명가 녹두장군 전봉준을 떠올린다.
불의 아래 고통받는 백성들을 보며 '부드럽게' 울고만 있을 수 없는 이 시의 화자는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가 청나라와 일본의 군사를 끌어들인 '큰 왕의 채찍'이 그와 이 땅을 부챗살처럼 갈라지게 만든다는 인식에 이르고 있다.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무식하게 무식하게' 내리는 눈을 맞으며 왜 실패한 혁명가를 생각했겠는가를 상기해보면 실로 눈물겹다.
시인은 무심히, 조용히, 내리는 눈 속에서 누군가 외치고 있는 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한없이 부드럽지만 땅에 떨어져서는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게 눈이다.
가난하고 헐벗어 타인들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가장 슬퍼하고 아파할 것 같은 한겨울에 무심하게 내리는 눈에 빗대어 속으로 울부짖는 시인의 마음은 차가운 겨울 하늘 아래 녹아 내리는 눈처럼 다가온다.
슬프게도 1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도 바른 말이 잘 통하지 않고, 불의로부터 억압을 받는 비극적인 역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게 아닌지. 이 땅(삼남)에 '무식하게' 내리는 눈은 '역사의 암울한 계절'을 상징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을 아프게 찌르기도 한다.
내가 유난히 겨울을 좋아하는 까닭과는 거리가 있겠지만….
지금도 어디쯤에선가 풍경들을 지우며, 또는 만들며 자우룩하게 눈이 퍼붓고 있을 것 같다.
강문숙(시인) 그림=장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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