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가야(28)-빼앗긴 역사의 자취

입력 2004-01-12 09:30:08

2004년 1월1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전격 참배했다.

1981년,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1870~1964)의 아들 오쿠라 야쓰이키 도쿄대 교수는 아버지가 모은 1천100여점의 한반도 유물을 도쿄국립박물관에 전격 기증했다.

일본 총리는 60여년 전 세계를 상대로 벌였던 전쟁과 그 전위대의 행위를 정당화했고, 도쿄대 교수는 같은 시기 아버지가 훔친 유물을 일본의 국고로 편입시켰던 것.

도쿄(東京)도 다이토(台東)구 우에노(上野)공원의 도쿄박물관 동양관 3층 '조선관'. 금동으로 만든 관모(金銅透彫冠帽)가 빛을 발했다.

유물 앞에 비치된 명패에는 '창녕 출토, 6세기, 오쿠라'라고 적혀 있었다.

500년대 비화가야(창녕)의 왕관을 오쿠라가 가져왔다는 설명이다.

한반도 유물이 일본의 수도 한복판에, 그것도 국립박물관에 버젓이 선보이고 있었다.

'가야, 6세기, 오쿠라'라고 적힌 유리관 안에는 금 귀걸이 한 쌍이 얼굴을 내밀었다.

쇠사슬 모양의 연결고리, 빈 공 모양 장식 등이 '대가야산(産)'임을 입증했다.

대가야 양식이 뚜렷한 F자 모양 말재갈, 대가야권인 경남 산청에서 나온 말안장, 소가야(경남 고성)의 청동 말띠드리개(銅製五鈴杏葉) 등도 전시관을 장식하고 있었다.

조선관에는 이처럼 잘 보존된 한반도 유물이 꽉 들어차 있었다.

대가야, 소가야, 신라, 백제의 유물을 망라했다.

이 중 절반 이상은 오쿠라의 수집품이었다.

그러나 정작 오쿠라 수집품 중 백미로 꼽히는 가야 금관은 눈에 띄지 않았다.

금관이나 금동관 등 주요 유물은 저장고에 별도로 보관하고 있었던 것. 결국 까다로운 절차를 거친 뒤 돈을 지불하고서야 우리의 유물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일본이 '중요문화재'(보물급)로 지정한 금관을 보는 순간, 가슴 설렘과 억울한 감정이 겹쳤다.

금띠에 풀잎 모양 솟은 장식(立飾)이 꽂혀 있고, 중앙에는 양파모양(寶珠形)의 봉우리가, 그리고 금띠와 솟은 장식에는 금 이파리로 된 달개장식(瓔珞) 수십 개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한동안 금관을 살펴보던 취재진은 양파모양 봉우리에 새겨진 특이한 무늬를 발견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봉우리 중앙에 새겨진 굽은 엑스(X)자 모양 무늬. 도대체 뭘까.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 해방 이후 줄곧 일본에만 묻혀 있던 터라 발견되지 않았던 독특한 문양이었다.

금관에 새겨진 수수께끼. 어쩌면 1천500여년 전, 가야 지배층의 숨은 역사를 풀 수 있는 한 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쓰야 시라이(白井克也) 도쿄박물관 주임연구원도 "금관을 수 차례 봤지만 이런 무늬가 있는 줄은 몰랐다"며 "뭔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같다"고 말했다.

안동대 사학과 임세권 교수도 "그와 비슷한 문양을 본 적이 없고, 무엇을 상징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국내 학계가 풀어야 할 '금관의 비밀'이다.

일제시대, 대구 남선전기 사장으로 있으면서 한반도 유물을 광범위하게 도굴 또는 수집했던 오쿠라 다케노스케. 대가야 금관 1점, 신라 및 가야 금동관 4점 등 고고 유물 550점을 비롯해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 등 모두 1천100여점을 그의 조국에 헌납한 애국자(?)다.

1929년 대구에서 자신의 수집품을 모아 '신라문화 전람회'를 연 것으로 봐 늦어도 그 이전부터 해방이 되던 해까지 유물을 모은 것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 오쿠라가 한반도의 도굴품을 집중 수집했다면,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발굴'이란 이름으로 한반도의 무덤을 샅샅이 파헤쳤다.

10여명의 '조선 총독부 고적조사위원'의 일원으로 참여한 세키노는 일제 통감부가 설치됐던 1909년부터 총독부 시절인 1911년까지 고령을 비롯해 대구, 현풍, 합천, 산청, 평양, 경주지역까지 훑었다.

일제가 '한반도 고적목록'을 작성한다는 명분이었다.

도쿄박물관에서 승용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도쿄도 다이토구 혼고(本鄕)의 도쿄대박물관. 세키노가 발굴한 뒤 맡긴 유물 중 대가야권 유물은 모두 40여점이었다.

진주에서 나온 원통모양 그릇받침의 원통에는 세로로 길게 꼬리를 내린 4개의 뱀 머리와 눈이 선명히 나타났다.

유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후손을 꾸짖고 원망하는 듯했다.

고령 대가야 왕궁 터에서 나온 연꽃무늬 기와, 고령 지산동 목 긴 항아리, 진주 옥봉 2, 3호 및 수정봉 7호 무덤에서 나온 대가야 토기 등이 1천500년이 지난 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자리를 바꿨다.

강릉 하시동에서 발굴한 신라토기, 낙랑(평양) 토기와 동전, 고구려 기와 등도 현해탄을 건너와 있었다.

도쿄박물관과 도쿄대박물관뿐 아니라 나라(奈良)현에도 귀중한 대가야 유물이 보관돼 있었다.

나라는 한국의 경주에 견줄만한 문화도시. 300~400년대 왜 왕권의 근거지였던 흔적이 뚜렷했다.

옛 일본왕실의 직속사찰인 나라현 동대사(東大寺). 동대사 안에 위치한 일본왕실의 보물창고, 정창원(正倉院). 그 창고 안에는 한반도에서도 원형이 잘 남아있지 않은 가야금이 잘 보존돼 있었다.

앞 뒤 판과 12줄, 양(羊)의 귀 모양을 한 형상은 어김없는 가야금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를 '신라금'으로 불렀다.

당초 있지도 않았던 신라금이라니? 그 이유는 정창원의 기록에서 드러났다.

그 기록에 따르면 이 악기는 823년 신라로부터 왜로 전해졌다는 것. 결국 우륵을 통해 신라로 넘어간 가야금이 왜에 전해지면서 본래의 이름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이처럼 수많은 문화유산을 이웃나라에 빼앗긴 한국. 빼앗긴 유물을 돌려 받기 위해 정부와 민간단체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오쿠라 수집품이 가득한 도쿄국립박물관의 경우 최근 사단법인화 한 바람에 국가간 유물반환의 길이 더욱 요원해졌다.

총리는 그들의 굴절된 역사마저 정당화하려고 하고, 국립대 교수는 도굴품을 국가에 헌납하는 일본에 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고령.김인탁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