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확 바꾸자(4.끝)-불.탈법자 만드는 선거법

입력 2004-01-10 11:06:17

선관위는 "선거운동기간이 아닌 때에 하는 선거운동은 모두 위법한 선거운동으로 사전선거운동에 해당된다"며 후보자가 후보등록을 마친 때부터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경북에서 출마를 준비 중인 한 예비후보는 "현행 선거법은 선거벽보를 붙일 때까지 손 놓고 가만히 있기만 하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를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4월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거의 모두 선거법 위반자가 된다.

아니 이미 범법자가 돼 있다.

막을 것은 막고 풀 것은 풀어야 하지만 모든 것을 막는 쪽이다.

때문에 선거법 규정 자체가 범법자를 양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다른 예비후보는 "과열을 막는다는 미명 아래 국민의 알 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현역 국회의원들에게만 특혜를 베풀고 있다"고 비난했다.

국회의원들은 선거운동기간 직전까지 의정활동 보고도 하고 당원 대상 모임도 가질 수 있는 반면 이름 석자 알리기도 바쁜 예비후보들이 법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거의 없다는 것이다.

선거사범을 단속하는 대구지검의 한 공안부 검사는 이런 현실을 빗대 "예비후보들은 숨쉬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법"이라고 했다.

현행 선거법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지를 단적으로 이야기해준다.

우리 선거법에는 유독 '의례적', '통상적', '단순한', '적극적'이라는 표현이 많다.

현행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불탈법의 기준과 잣대가 이런 것들이라면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지 모른다.

법이 이러면 선거법 관련 선관위의 유권해석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구에서 출마를 준비 중인 한 예비후보는 "빨간 불이면 서고 파란 불이면 가도록 하는 뚜렷한 규정이 있어야 하는데 선거법은 모두 애매한 노란불이어서 신호등 구실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고 꼬집었다.

어느 것 하나 객관적인 잣대가 없다.

이렇다면 사람에 따라, 장소에 따라, 시간에 따라 기준은 한없이 달라질 수 있다.

더욱이 불.탈법 행위라도 한 쪽에는 경쟁자가 있어 이를 문제삼으면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되지만 경쟁자가 없어 이를 문제삼는 사람이 없으면 또 단속이나 처벌되지 않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얼마전까지 현직 판.검사로 있다가 나온 예비후보들이 최근 선거법 위반으로 선관위로부터 경고를 받은 사례도 있다.

선거법 규정이 불법을 저지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법률 전문가들조차 이런데 다른 후보들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선거법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선거사무실=선거운동 관련 사무실을 여는 것 자체가 선거운동기간 전에는 모두 불법이다.

개소 러시를 이루는 연구소, 연구원 등의 사무실은 사실상 선거 관련 사무실이다.

선관위도 후보도 불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넘어가는 것이다.

이름만 다르게 달고 실제로는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공공연한 불법이지만 이정도는 봐준다.

또 사무실 외벽에 붙어 있는 간판도 대형화되는 추세이지만 법에는 가로 세로 1㎡ 크기를 넘으면 안되게 돼 있다.

하지만 그 규격 안에 드는 것을 구경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다 불법이라는 말이다.

▲명함과 인사장=후보자를 알리는 중요한 수단인 명함이나 인사장에 대한 규정도 기막히다.

선거운동기간 전에는 명함에 사진을 실을 수 있지만 학.경력을 담을 수는 없다.

통상적 인사에서 명함을 줄 수는 있지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명함을 배포하거나 살포하면 불법이다.

명함을 본인이 돌리는 것은 합법이지만 부모가 자식의 명함을 돌려도 불법이 된다.

또 사무소 개소.이전 등을 알리는 인사장 내지 안내장에는 입후보 예정자의 성명이나 사진을 표시하면 안 된다.

인사장은 한정된 범위 안에서 지역 유지나 유관기관.단체에 발송하는 것은 가능하다.

'평소 친교가 없는' 선거구민이나 소속 당원 모두에게 발송해서는 안된다.

특히 인사장에 입후보 예정자의 이력을 서술형으로는 쓸 수 있지만 이력서 형식으로는 쓰면 불법이다.

거의 억지 수준이다.

이러니 대다수 예비후보들은 불법을 저지른다.

▲음식물=선거법 규정은 한마디로 웃긴다.

사무소 개소식 참석자나 방문자에게는 '통상적' 범위 안에서 다과류(3천원 이하)의 음식물을 제공할 수 있다.

식사는 안된다.

다과.빵.떡.김밥.음료는 된다.

밥은 안되고 김밥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김과 밥을 따로 두면 어떤가. 불법이다.

정당행사에서도 음식물 규정은 까다롭다.

창당.개편.경선대회 참석자에게는 '통상적' 범위 안에서 식사류(5천원 이하)의 음식물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단합.수련 등 당원집회나 당원교육에서는 다과류만 제공할 수 있다.

의정활동 보고회나 지구당의 당직자회의에서도 다과류만 가능하다.

◇개선방향=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우리의 선거법이 '지킬 수 없는 법'이거나 '지키지 않아도 되는 법'이거나 아니면 '지키면 (당선이) 안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또 선거법과 선관위의 유권해석이라는 잣대가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데다 상황에 따라 길어졌다 줄어드는 고무줄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거법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김태일 교수는 "인터넷 선거운동의 위력이 지난 대선에서 여실히 입증됐지만 아직 선거법은 이에 대한 뚜렷한 규정도 없다.

시대변화에 법이 따르지 못하고 무조건 못하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이어 "지금과 같은 법체계 아래서는 모든 후보를 범법자로 만들고 걸린 사람은 다들 수긍하지 않고 재수없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을 것이다"며 "이래서는 법제도의 실효성도 없고 설득력도 떨어진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법집행의 엄정함과 단속.처벌의 공정함과 준엄함은 그 다음이라고 했다.

또한 선관위의 선거관리 기능 강화 필요성도 제기했다.

김 교수는 "각종 선거의 생활화라는 시대 변화에 걸맞게 선관위의 관리 기능과 권한이 강화돼야 하며 그 전에 반드시 애매모호하고 있으나마나 한 법.규정은 시대변화에 걸맞게 대폭 현실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동관기자 llddk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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