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 1월 후금이 3만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정묘호란이다.
국왕은 강화로, 세자는 전주로 피난했다.
후금의 조선침공은 인조반정 후 조선의 노골적인 친명배금 정책에서 비롯됐다.
후금은 명나라 침공에 앞서 배후의 위협을 정리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과 후금은 형제국의 예를 갖추기로 하고 같은 해 3월 화의를 맺었다.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형제국 관계를 맺은 후금은 1632년(인조10년) 만주 전역을 석권했다.
이후 명나라의 북경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대해 신하의 도리로 섬길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말 3천필 등의 세폐(歲幣)와 정병 3만을 보내라고 요구했다.
▶후금의 이 같은 요구에 조선은 결전의 태도를 취했다.
황제라 칭한 청 태종은 1636년 12월 20만 대군으로 쳐들어왔다.
병자호란이다.
청은 진격로 주변의 성을 공략하지 않고 곧바로 한성으로 향했다.
조선은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비, 원손,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했다.
인조도 강화도로 피난길에 올랐으나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당시 남한산성에는 병사 1만 2천명과 두 달 치 식량만 있었다.
항전은 역부족이었다.
▶1637년(인조15년) 1월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됐다.
청은 남한산성을 직접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보급로를 차단하고 고사작전을 폈다.
혹한으로 동사자가 속출했다.
최명길 등 주화파와 김상헌 등 주전파 사이에 논쟁이 거듭됐다.
강화도가 함락되자 청과의 강화교섭이 급진전 했다.
당시 청나라가 제시한 강화조건은 △청나라에 군신의 예를 지킬 것 △명의 연호를 폐하고 왕래를 끊을 것 △조선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성절(聖節).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경조(慶弔) 등의 사절은 명나라의 예에 따를 것 △명나라 정벌시 보병, 기병, 수군 등을 제 날짜에 보낼 것 △기묘년부터 일정한 세폐를 보낼 것 등이다.
▶조선은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올렸다.
소현세자, 세자빈, 봉림대군 등과 척화의 주모자로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3학사를 인질로 보냈다.
조선에서는 이후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끊임없이 제기됐으나 공염불이었다.
청에 대한 조선의 사대외교는 청나라가 1895년의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 패할 때까지 유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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