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샨티니케탄에서 만난 사내

입력 2004-01-08 09:02:09

지난 여름 한 철을 나는 인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보냈다.

샨티니케탄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 마을은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작가 시인 음악가 화가 철학자들이 함께 모여 살며 진실로 사랑할만한 삶의 공동체를 핍진한 현실 속에 구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시를 써오는 내내 이 마을을 방문하고 싶었던 것이 나의 오랜 꿈이었다.

중학교 시절, 처음 타고르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세상에 내가 알지 못하는 또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타고르의 시였다.

그의 시에는 갓 태어난 아기와 대화를 나누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어 있었고, 엄마에게 요정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배어 있었다.

엄마, 엄마가 걱정하시지만 않는다면/ 나는 자라 이 강변의 / 뱃사공이 될거예요, 라는 시 구절은 오랫동안 내 가슴에 출렁이는 물살로 남아 있었다.

아열대의 숲으로 둘러 싸인 마을 안길에는 작은 바자르가 있고, 낡은 서점과 찻집들, 붉은 벽돌로 세운 우체국이 있었다.

1루피(30원)에 짜이(茶) 한 잔을 마시고 서점에 들러 인도의 옛 이야기책들을 뒤적이다가 우체국에서 엽서를 쓰는 한적한 시간들이 타고르의 시 한 구절을 읽는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밤이면 숲속에 하늘의 별밭인 듯 반딧불이의 축제가 벌어지고 바울이라 불리우는 집시들의 노래소리가 맑고 쓸쓸하게 울렸으니 참으로 죄스러운 행복감 속에 하루하루가 신기루처럼 지나갔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바자르 골목을 벗어나오던 나는 한 풍경을 보았다.

한 사내가 무릎을 꿇고 길에 엎드려 있는데 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머리부터 어깨선까지를 온통 땅속에 묻고 있었다

40℃도를 훌쩍 넘는 인도의 혹독한 여름날씨는 사실 이 나라에 대한 특별한 이해와 사랑을 지니지 않는한 견뎌내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사내는 이 쩔쩔 끓는 염천에 숨구멍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머리를 땅속에 묻고 있었던 것이다.

사내의 고행은 소나기가 억세게 쏟아붓는 시간까지 한 나절 내내 계속되었다.

그동안 사내의 몸은 단 한 차례의 꿈틀거림도 없었다

비가 쏟아지자 사내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일어서서 머리의 먼지를 턴 그는 땅에 납작 엎드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체투지. 쓰레기와 악취가 빗물에 쓸려가는 그 길을 그는 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을 때 나를 본 그가 한 차례 눈인사를 했다.

그 눈빛의 맑음이라니…. 무엇 때문에 이런 고행을 하나요? 내가 마음 속으로 묻는 동안 그는 길의 끝까지 천천히 움직였고 나는 그의 모습을 오래 지켜보았다.

어린 타고르가 멱을 감았을 강물과, 술레잡기를 했던 나무 숲과, 그가 어머니와 함께 라마야나 이야기책을 읽었던 챔파꽃 그늘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내내 그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기실 샨티니케탄을 떠나는 순간 내게 그토록 열망했던 타고르의 시와 그에 대한 추억의 해후들보다 그 사내의 기억이 더 깊게 남았음은 어떤 이유였을까.

모든 인간은 고통과의 싸움을 통해 그 정화된 영혼의 심연을 지니게 된다.

고통의 강을 건너지 않고서는 새로운 삶과 희망, 진보의 시간들을 꿈꿀 수 없는 것이다.

새해가 벌써 한 주일이 지났다.

어떤 이는 새해의 화두를 경제라 말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지저분한 정치의 청산이라 말하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경제와 정치가 잘 이루어지면 진실로 살만한 세상은 오는 것일까. 그런데 가만히 앉아 있어도 경제와 정치는 절로 잘 이루어지는 것일까.

새해의 화두는 잘 먹고 잘 살자는 경제도, 정신 나간 정치도 아니다.

보다 순결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순결한 꿈을 위해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 보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내가 지닌 것들을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공동체 전체에 번져나갈 수 있을 때 새로운 세상은 올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꿈꾸는 시간을 위해 기꺼이 고행하며, 오체투지로 소나기 속을 느릿느릿 전진하던 사내의 모습이 내내 그립게 느껴지는 것도 그런 소치이다.

곽재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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