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른쪽 갈령이 내려다 보이는 비재 위 능선에 서니 기분이 풍광에 스스로 취했다. 아침식사와 함께 쐬주를 반주 삼아 몇 잔씩 돌리고 난 뒤 오전 8시 30분쯤 하산 길에 나섰다. 아침식사 시간은 늘 칼같이 한시간 가량 걸린다. 내리막은 급경사길이다.
오전 9시 3분쯤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 비재에 도착했다. 아, 비재. 올해 한 해 비가 징그럽게 내렸다. 논농사, 밭농사, 과일농사 다 작살을 내고. 특히 여름장사는 망했을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대간 산행의 마지막 재가 비재다. 참 우연치고는 너무나 운명적이다. 그래서 나는 운명을 믿는다. 무슨 운명. '내가 잘 될 것'이란 운명. 뭐야. 그것은 운명이 아니고 착각이지. 이런 착각은 인생에 도움이 되는 좋은 착각이 아닌가요.
차도 뜸하다. 교통량과 관계없이 동서를 넘는 재마다 다 아스팔트 도로다. 생명의 흙을 치우고 산을 깍고 자연을 파괴하고 아스팔트라는 반생명과 편리, 인공을 덮어 씌운 것이다. 좋지 않은 것 같다. 천연 자연에다가 문명의 칼로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낸 것이다. 단체기념 사진도 찍었다. 뭐, 기념이라고 찍냐. 자연파괴기념이라고. 잘도 갖다 붙힌다.
북쪽으로 올라가는 철 계단을 올라서 대간 산행을 계속했다. 대간 능선에 올라서자 사방이 아프카니스탄의 산악지대다. 인가는 완전 사라지고 온통 호쾌하고 장쾌한 산 밖에 없다. '산나라'. 인기 가수 '장나라'의 동생인가.
저 멀리 북쪽 형제봉이 아련히 보인다. 겹겹이 쌓인 장엄한 속리산의 산악들이 따사로운 아침 햇살을 받으면서 왕관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역시 국립공원은 국립공원이야. 형제봉이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하거든요.
겨울 산이다 보니 휑하고 을씨년스럽다. 간혹 청명한 새소리만이 꽁꽁 언 호수의 얼음이 깨지듯 하늘을 금 가게 하고 있을 뿐이다. 식물도 동물, 모든 생물이 보이지 않는다. 종적을 감췄다. 고요, 침묵, 적막, 고독이 꽉 차있다. 적멸직전.
청송(靑松)만이 파수꾼이 되어 고요히 이 산을 지키고 있다. 대지와 그 위의 모든 생물들이 겨울에 구속을 받지만 유독 하늘만이 겨울에서 자유롭다. 산천은 얼어도 하늘은 얼지 않는다. (이헌태도 겁 먹으면 어는데. 겁도 먹나. 제일 맛없는 게 겁이죠). 그래서 땅보다는 하늘을 더 쳐주나. 천기가 지기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해요. 땅과 하늘은 같은 자연이지만 게임도 안되지. 지구도 우주에서 보면 티끌 같은 존재니까.
비재에서부터는 거의 '똥개 훈련'. 땀 뻘뻘 흘리며 가파르게 올라가고 또 가파르게 내려오는 봉우리가 연달아 쭉 늘어서 있었다. 오르내리는 굴곡이 별로 없었던 상주 야산의 대간 길이 그립다. 이헌태, 아까는 지겹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는 그때가 좋았다고 하고, 너무 간사한 것 아니야. 원래 인간이 그래요. 고생하면 편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또 편안하면 고생했을 때가 그리워집니다. 인간은 그런 동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웃기고 재미있는 동물이라고 하더라구요. 넘어갑시다.
비재를 떠난 뒤 네번째 봉우리부터는 화강암 바위가 드문드문 놓여 있어 우아한 산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속리산 종주 산행을 앞두고 예고편, 맛뵈기. 사방에 첩첩 겹쳐놓인 큰 산들도 화강암 흰 뼈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용이 꿈틀거린다거나, 호랑이가 내달리는,또 한우가 등을 실룩거리면서 마구 뜀박질하는, 대장군이 말을 타며 질주하는 듯한 산의 형세. 더 보태면 모자가 아니라 코끼리를 덮은 그림이 '어린 왕자'에 나오는 것처럼 카펫 아래 크고 작은 동물들이 마구 달리는 모양. 뭐야.
솟구친 기암괴석. 슬슬 감탄이 터져 나오는 비경을 슬쩍 슬쩍 보여주더라구요. 국립공원은 근처만 가도 '행세'를 하더라구요. 즉, '꼴 갑 떨고 있다'는 것이죠. 아니, 한국의 우두머리급 산들이 기상과 기품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힘들게 힘들게 다섯 개 봉우리를 넘어서니 동쪽 아래, 산에 둘러싸인 아담한 마을이 놓여있고 뱀 같은 폭좁은 도로길이 높은 산 능선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이번 산행은 '구절양장'이 아니고 '구절구절' 이네. 이헌태의 잡글이 '주절주절' 하는 것 닮았나. 뭐야.
왼쪽으로 확 꺽어 또 봉우리를 지나고 일곱번째 봉우리에 올라서니 무지무지하게 커다란 묵직한 바위가 길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오전 11시쯤에 대간 능선 가운데 백신종 선배가 유명한 '못재' (천지)라며 사진을 찍고 있다. 능선에서 늪은 처음이다. 늪에 빠지면 죽는다고 한다. 거짓말도 잘하시네. 얼어서 그런지 아무리 밟아도 끄떡없다. 솜털을 단 억새가 늪을 향해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장미는 한 송이라도 멋있지만 억새는 뭉쳐야 더 멋있다나. 이승만 대통령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는데. 이헌태 같은 술꾼들은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사는 거죠. 뭉치면 돈 깨지고 속 깨지니까.
오전 11시 15분쯤, 아홉번째 봉우리에는 커다란 헬기장이 있다. 이름 붙여 '680미터 봉'. 주위 포진한 억새가 멋지게 휘날린다. 태극기 휘날리듯이. 잠깐, 아주 쬐금, 눈발이 날려서 너무 좋아했더니 약만 올리다 그친다. 올해 대간 산행으로서 첫 눈이라서 크게 기대했는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다. 다음 산행에서는 눈 산행을 할 것인가. 꼭 기대해본다.
사위가 나무에 둘러 쌓여 있지만 그 너머 준수한 산들이 언뜻 언뜻 얼굴을 내비친다. 해는 구름에 가려있는지, 재미가 없는지 핼쓱하게 흰 색으로 맥없어 떠 있다. 치아라 짜삭아. 니가 해냐.
댓글 많은 뉴스
"재산 70억 주진우가 2억 김민석 심판?…자신 있나" 與박선원 반박
이 대통령 지지율 58.6%…부정 평가 34.2%
김민석 "벌거벗겨진 것 같다는 아내, 눈에 실핏줄 터졌다"
트럼프 조기 귀국에 한미 정상회담 불발…"美측서 양해"
김기현 "'문재인의 남자' 탁현민, 국회직 임명 철회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