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욕심 사나운 고리대금업자처럼 모든 만물을 제 안에 거두어들인다.
스크루지 영감처럼 냉혹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선, 그동안 대지에 베풀었던 은혜와 자비의 대가를 요구하듯 가진 것을 몽땅 앗아간다.
태양마저 제 온기를 빼앗긴다.
남겨놓는 것은 오직 차가운 북풍과 한설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겨울에 길을 떠도는 사람은 더욱 외롭고 고달픈 신세가 된다.
'삼포가는 길'은 엄동설한에 갈 곳을 잃고 길 위를 떠도는 자들의 이야기다.
철새처럼 공사장을 전전하는 날품팔이 영달과, 이와 비슷한 처지인 노동자 정씨, 그리고 작부로 일하던 술집을 몰래 도망쳐 나온 백화라는 젊은 여자가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이 가진 공통점은 모두 생활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길 위를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허나 그건 그들이 원한 게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할 힘이 없을 때 현실은 숙명이 된다.
그런 이유로 그들을 구원해 줄 전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전망부재의 현실은 그 자체로 시련이고 고난이다.
더욱이 소설에 묘사된, '바람이 창공을 베고' '강물이 꽁꽁 언' 차가운 겨울이다.
그래서 그들의 떠돎은 더욱 비극적인 울림을 자아낸다.
서른 남짓한 노총각인 영달은 공사장에서 날품을 팔며 옥자라는 뜨내기 작부를 만나서 살림을 차려보거나 함바집 주모와 몰래 정을 통하기도 하면서 덧없이 세상을 떠돈다.
또 교도소에서 기술을 배워 나온 서른중반의 정씨도 외롭게 객지를 떠돌기는 영달과 매한가지다.
열여덟 나이에 가출하여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몸을 파는 작부인 백화 역시 '날마다 내일 아침이면 고향으로 출발하리라 작정'하지만 실패하고 마는, '하도 빨아서 재봉실이 나들나들하게 닳아빠진 속치마'같은 그런 따라지 신세일 뿐이다.
바람불고 추운 겨울, 우연히 길에서 만나게 된 이들은 처음엔 서먹해 하지만 곧 길 위를 떠도는 서로의 처지를 이해한다.
가난하고 의지가지 없는 그들 세 사람이 지닌 유일한 재산은 아직 마음속에 온기를 피어 올리는 따스한 인간적 감정이다.
돈 모으면 함께 살자며 식모살이를 떠난 옥자를 못 잊는 영달이나, '갈매기 술집'에서 군대감옥에 갇힌 이름 모를 죄수들에게 담배와 음식물을 차입하며 기쁨과 평화를 느꼈던 백화는 누구보다 따뜻하고 다정한 품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못 가진 자에게 더욱 혹독한 겨울, 그들 세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고 위로하기도 하면서 겨울 추위로 얼어붙은 길을 동행한다.
이 과정에서 백화와 영달은 서로에게 야릇한 호감을 품는다.
그러나 전망 없이 길 위를 떠도는 자들에게 내일은 기약할 수 없는 약속이란 걸 그들은 잘 알고 있다.
세 사람은 가까스로 기차역에 도착하지만 그들에게 약속된 장소는 없다.
그나마 마음의 고향을 가졌던 정씨마저 '삼포가 개간사업으로 엄청나게 변해'버렸다는 말을 듣는다.
결국 그도 백화나 영달처럼 돌아갈 곳이 없는 부평초 신세가 되고 만다.
작가는 이 짧은 소설 속에서 간결하고 사실적인 문체로 영화를 보여주듯 한국적 겨울 풍경을 탁월하게 그려내고 있다.
'마을의 골목길은 조용했고, 굴뚝에서 매캐한 청솔 연기 냄새가 돌담을 휩싸고 있었는데 나직한 창호지 들창 안에서는 사람들의 따뜻한 말소리들이 불투명하게 들려왔다'라거나 '아직 초저녁이 분명한데 날씨가 나빠서인지 곧 어두워질 것 같았다.
눈은 더욱 새하얗게 돋보였고, 사위는 고요한데 나무 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는 표현은 독자를 깊은 겨울의 한 가운데로 이끌어간다.
또한 이 소설은 삶의 정처를 잃고 떠도는 하층민의 아픔을 그려내고 있지만 달리 보면 인생이란 굴곡진 길 위에서 떠돌며 사랑하고 헤어지는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마음의 정처'를 상실하고 도시 속에서 헤매는 현대인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가난하고 암울했던 7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그러나 아직 진행형이다.
아직 이 사회에는 백화나 영달처럼 정처를 잃고 길 위를 방황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이 겨울, 차가운 거리를 떠돌고 있을 그들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박희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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