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근대 여명기 대구.경북 경제 그리고 부호들

입력 2004-01-02 13:48:40

일제의 대표적인 수탈품목이면서 조선의 산업과 무역 그리고 민초들의 생존권을 좌우하던 미곡(米穀)을 둘러싼 대구, 경북지역 근대화 여명기의 경제흐름은 어떠했을까.

매일신문사는 대구, 경북지역의 근대화 여명기 미곡시장을 둘러싼 경제흐름과 부호들의 흥망성쇠를 가늠할 수 있는 두컷의 희귀 사진을 입수, 사진의 배경이 된 당시 지역 미곡거래 실태를 되살펴 봤다.

# 쌀이 무역이요, 쌀이 산업이다

"조선의 무역은 쌀이다". "조선의 산업은 쌀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쌀은 근대화 여명기 우리경제에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런데도 농업생산적인 측면에서 쌀시장을 다룬 일은 있어도 주요한 무역품목으로서 그리고 일제의 중요한 수탈품목으로서 미곡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일부 생사 공장을 제하고 별다른 제조업체가 없었고, 공업화도 시작되지 않은 해방 이전 지역의 경제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품목은 바로 쌀. 쌀이 거래되는 미곡시장은 수탈을 본격화하려는 일제의 탐욕과 미곡 거래를 통해서 부(富)를 얻으려는 대구, 경북지역 상공인들의 사업열 그리고 부호들의 엉큼한 투기열기가 뜨겁게 교차되는 치열한 현장이었다.

요즘에야 인터넷으로 전국 어디 쌀이라도 지천으로 살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쌀은 정기 시장에서 거래됐다.

이를 일본어로 '기미'(期米)라고 한다.

'기미'는 '정기미'(定期米)의 약자로 쌀(米)을 정기적으로 거래하는 시장(取引所)을 말한다.

기미에서는 미곡 현물(現物)을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미곡 시세차를 이용하여 매매 약속을 하는 선물(先物)도 취급됐다.

쌀 선물시장은 일종의 투기업이다.

보통 3개월 한도로 거래하며, 거래 방법은 경매이고, 미두꾼들은 '合白'이라는 도박을 즐기기도 했다.

# 대구의 미곡거래소

대구 미곡거래소의 효시는 1914년(대정 3년)에 회원조직으로 생겨난 미곡상들이다(일본인이 발행한 '경북의 상공수산' 참조). 경상북도 곡물상연합협의회도 미곡을 다루는 회원들의 조직으로 1924년 6월 8일 대구상업회의소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다.

대구미곡거래소는 오늘날 대안동인 大和町(야마토마치)에 있었다.

구 경북인쇄소 남쪽이다.

1914년에 발효된 시장규칙에 따라 1931년까지 17년 이상 회원조직으로 쌀 현물을 거래하던 대구의 미곡상들은 1931년에 발효된 조선거래소령에 따라 미곡의 현물 및 선물 거래까지 가능한 미곡거래소로 승격됐다.

원래 미곡거래소는 전국에 9개가 있었으나 이때 대구, 군산, 목포, 부산, 진남포 등 5개로 줄어들었다.

다만 인천미곡거래소는 없어지는 대신 미두청산거래소로, 서울미곡거래소는 유가증권 및 현물거래만 취급하도록 바뀌었다.

회원조직에 의한 대구의 곡물상들이 선물 및 현물쌀 취급이 가능해진 대구미곡거래소로 격상되면서 취급되는 쌀의 규모로 엄청나게 늘어났다.

# 대구미곡거래소 1년 거래액은 서문시장 연간 거래액의 135배

선물과 현물 쌀 취급이 동시에 가능해진 대구미곡거래소의 경우 현물 쌀 거래는 전체 물동량에서 미미한 반면 선물 취급량이 절대적이었다.

1931년의 경우 대구미곡거래소에서 취급되는 쌀은 현물이 9천600섬(이때 섬은 일본 계량단위로 한 섬은 2가마), 연간 거래액은 13만9천928엔이었다.

이때 선물 거래는 741만6천섬으로 현물 거래의 60배 가까이 되었고, 연간 취급액도 1억3천438만6천220엔에 달했다.

대구미곡거래소의 관장 지역은 경북 일원이었고, 사무소는 야마토마치 65번지. 당시 회원은 13명, 자본금은 1인당 5천엔(1931년 당시 쌀 1가마는 8엔45전, 당시 물가표 참조)으로 총 투자액은 6만5천엔이었다.

대구미곡거래소에는 이사장, 상임이사 각 1명, 이사 3명, 감사 2명이 근무했다.

미곡거래소의 회원들은 독과점을 방지하기 위해 3개월에 3번 매매계약을 할 수 있었고, 하루에 16번(전장 10번, 후장 6번) 경매에 입회할 수 있었다.

대구미곡거래소는 대구가 내륙의 중심지라는 교통여건과 대상인들의 활약에 따라 조선지역의 미곡거래소 가운데 굴지의 대시장으로 급성장했다.

1934년 대구미곡거래소의 거래액은 서문시장의 연간 거래액의 135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 미곡은 투기 대상

대구의 미곡상들은 1931년 대구미곡거래소가 정식으로 쌀 현물, 선물을 취급할 수 있기 전에 일본으로 다니며 선물취급이 가능토록 로비를 다니기도 했다.

오늘날 큰손들이 거액의 부동자금으로 아파트 분양권 시장에 뛰어들어 분양권에 프리미엄을 붙여서 사고파는 투기를 한다면 당시에는 쌀이 투기품목이었던 셈이다.

대구 미곡시장의 큰손은 대구물산(1919년, 설립연도) 대구산업(1920년) 대구상사(1930년) 대구물산(1932년) 이토오상회(1934) 등이 있다.

미곡상은 대구 32명, 경북 28명 등 총 60명이었다.

경북지역에서는 청송 고령 안동 등에 미곡상이 있었고, 이들은 마치 중동 석유시장에서 메이저 석유사들이 국제기름값을 좌우하듯이 미곡값을 쥐락펴락했다.

그러나 미곡시장에 아무나 뛰어들 수 없었다.

쌀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 쌀을 사들일 수 있는 자본, 그리고 상공계에서 지위가 있어야했다.

게다가 일본과의 관계설정도 필요했을 것이다.

#조선인 곡물업자들은 대구경제계의 큰손들

1934년 당시 대구 경북의 곡물업자는 서상일(대안동) 서상현(대안동) 이상무(대안동) 정해붕(하서동) 장길상(북성로) 한익동(종로, 대구상공회의소 의원, 부회두) 등이 있었다.

물론 대구 경북지역의 미곡시장에서 가장 왕손은 일본인 사토 이자부로. 사토 이자부로는 대구상공회의소 의원으로 의석 제1번을 차지하는 인물이었다.

미곡상들이 숱한 다른 직종을 젖히고 의석 1번을 차지할 정도로 쌀이 산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서상일은 일본 상권에 대항 혹은 상권을 파고들기 위해서 지역 상공인들로 구성된 대구구락부를 만든 주역이다.

이상무는 이상화의 큰아버지 이일우의 둘째 아들로 상화 시인의 사촌형이다.

정해붕의 곡물가게는 일본인 전용타운인 북성로에 있었고, 이름은 태양상회. 장길상은 현재 엘디스리젠트(구 동산호텔)가 들어선 자리에 99칸 집을 지녔던 장승원의 아들로 장직장, 장택상과 형제간이다.

장길상의 집에는 집안의 연못에 배를 띄울 정도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한익동 역시 대구 경제계를 주름잡은 부호로 종로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1920년에 제1회 곡물대회(정식명칭 조선곡물연합회 대회)를 열었고, 1923년에 제3회 곡물대회를 열었다.

이때 일본과 한국 각지에서 활동하던 미곡업자들이 운집, 대구 삼덕동에서 기념촬영을 했으며, 이때 농기구전람회도 같이 열었다.

#기미 실패가 현진건을 죽음으로 몰아넣어

조선내의 쌀 수급 뿐만 아니라 일본내의 쌀 수확 현황과도 직결됐다.

1921년 일본에서는 대규모의 서민들이 동참한 쌀 소요가 일어나 조선의 쌀 수급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갖기도 했다.

국내외 쌀 수급과 직결된 대구 '기미'는 항상 비탄과 환희, 이익을 남겼다는 성취감과 손해봤다는 아쉬움이 교차하는 등 곡물상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투기장인 기미에서는 돈을 버는 사람보다 돈을 잃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일본인들은 교묘히 대구 부자들의 재산을 빼내가기 위해 보증금을 걸게 했으며, 대구의 갑부들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고, '운수 좋은 날'의 소설가 현진건도 '기미'에 손을 댔다가 쫄딱 망하여 죽었을 정도이고 보면 그 폐해를 짐작할 수 있다.

최미화기자 magohalmi@imaeil.com

(도움말, 자료제공 윤장근 죽순문학회장, 김일수 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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