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는 참고 /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설날 아침에'라는 시의 제목처럼, 마땅히 새해는 그렇게 시작하고 싶다.
사람들의 생각이 대부분 그러할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제각각 허공에 그리는 나이테의 수만큼씩 거듭 맞는 새해지만, 작은 희망 하나 걸어 볼 수 있는 여유가 있기에 신년벽두는 공휴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2004년을 맞이하는 이 첫 아침도 변함없는가 물으면, 고개가 옆으로 기울고 만다.
김종길 시인의 표현처럼, '세상은 /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
왜 그러냐고 되물으면, 누구나 지난 한해를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밖에 없다.
꿈을 가지고 짐짓 미소를 짓기엔 현실이 너무 참기 어렵다.
새해임에도 불구하고 금방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고 마는 까닭은 정치적 혼란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정치적 불안정성이 클수록, 역설적이게도 국민 생활의 정치적 의존도는 더 높아진다.
우리는 그런 이율배반의 함수 속에서 지난 한해를 헤쳐 왔다.
그래도 새날은 새날이니만치 뭔가 다른 방식으로 인사를 할 필요가 있다.
매양 뒤돌아보고 비슷한 푸념을 되풀이할 수만은 없다.
비판과 성찰은 필요한 것이지만 과거의 언어다.
모두 용기를 내어 시작해야 할 다짐은 현재의 심경이요, 미래를 향한 약속이다.
비록 또 실패할지언정, 우리가 바라는 삶과 사회를 위한 덕담을 만들어 내야 할 때가 바로 오늘이다.
새해에는 좀 세련된 정치가 행해지기를 바란다.
이 간절한 염원을 달리 쉽게 표현하면, 이제 더 일일 연속극 같은 정치를 겪게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드라마를 한꺼번에 폄하하자는 의도는 아니지만, 그날그날 벌어지는 일들을 비꼬아 구경하기에는 재미가 있어도 예측불허의 전개는 사회적 삶을 불안하게 만든다.
정치가 삼류 희비극의 범주에서 맴도는 한, 정치를 바라보거나 행하는 곳에 서 있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고통만 주고받을 뿐이다.
더는 국민을 싸구려 정치쇼의 관객으로 만들지 말자.
여당과 야당은 타협하는 기술을 많이 익혀야 한다.
정치는 이 국가 사회의 다양한 형태의 삶을 함께 아우르는 것이므로, 불도저같이 밀어붙이는 뚝심만으로는 바람직한 통합을 일궈내지 못한다.
결정적 순간에 양보하고 합의할 줄 알아야 신뢰를 얻게 된다.
적어도 대립하는 사사건건의 3분의 1 정도라도 화합의 결론으로 해결한다면,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놀랍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선명히 대립한 이념과 세대의 전선도 부드러운 의사소통으로 서서히 허물어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연령과 지역 기반과 성향을 떠나서, 우리는 모두 일정한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할 수 있는 여유와 아량과 배짱을 가졌으면 좋겠다.
젊은 지지층을 토대로 들어선 예상 밖의 정부가 아무리 개혁적으로 덤벼든다 하더라도 국민의 일상을 망쳐 놓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늘상 벌어지는 일은 개혁이나 변화가 아니라, 개혁의 요구와 반대의 부르짖음뿐이다.
돌이켜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개혁을 표방한 정부가 제대로 해낸 개혁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예상을 조금 벗어난 개혁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슴을 준비하자.
개인의 인간다운 삶의 질과 사회의 합리적 질서 확보를 목표로 개혁에 동참한다 하더라도 구체적으로는 점점 벌어지는 계층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방향이어야 한다.
가장 먼저 눈을 돌려야 할 곳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차이와 갈등이다.
그리고 서울과 지방의 불균형이다.
빈부의 문제는 소유와 소비 수준의 비교에서 산정되는 돈의 가치를 훨씬 넘어서서 사회 한 모퉁이를 파괴한다.
지방의 정체는 서울로부터 떨어진 거리보다 더 멀고 깊을 정도로 심각하다.
이런 몇 가지가 해결된다면, 혹은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은다면, 그래도 우리는 좀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설픈 정치를 또 일 년 반복하면, 그때는 국민의 실망과 분노를 실은 시간이 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흔히 시간의 냉정함을 달리 일컬어 역사의 심판이라 하지만, 오늘은 대신 우리가 말한다.
새해 아침과 화해하는 기분으로 너그러이 참고 말한다.
다음에는 정치인들이 대답할 차례다.
그렇지 못할 때 세월의 판결문은 가혹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희망으로 삼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고로 새겨두기 위해, 이용악의 시 '새해에' 중에서 한 구절을 함께 읽는다.
'말하라 세월이여 / 이제 / 그대의 말을 똑바로 하라'
차병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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