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보는 큰 기계들이 실려 왔다.
그리고 한 아이가 다가왔다.
"니가 이집 딸이가. 얼굴이 억수로 뽀얗네".
짧은 머리를 한 그 아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나는 처음 보는 나에게 마치 오래된 친구나 되는 것처럼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그 아이에게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야, 잘 지내자 카는데 와그라노. 내 이름은 선애다".
"선애?"
"와? 니도 내가 머스마인줄 알았나? 내가 말이다.
범띠 가시내 아이가. 그래서 꼭 남자 같은 기라".
"으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 아이는 갑자기 소리를 내며 웃었다
"니 놀란 눈이 왕눈깔 사탕 같다 아이가. 우리 공장에서 크레파스도 만들고 색연필도 만들끼란다.
니도 놀러 오거라".
나보다 한 살 적다는 그 아이는 오히려 자기가 언니라도 되는 듯 어깨를 한번 툭 치고는 가버렸다.
쇠판이 한번씩 올라갈 때 마다 크레파스들이 고드름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선애 엄마가 그것들을 바구니에 담아서 작업대 위로 올려놓았다.
선애 언니는 작업대 위에 올려진 크레파스를 하나하나 집어서 종이옷을 입혔다.
그렇게 종이옷을 돌돌 감아 입히고 나면 크레파스들은 가장 무도회에 나가는 공주처럼 화려해졌다
열두 색 이상은 만들지도 않았고 뚝뚝 잘 부러지고 거친 것이 아이들이 많이 찾는 고급크레파스와는 비교도 안 되었지만 나는 색의 마법에 빠져 매일 선애네 공장으로 구경을 갔다.
그리고 열두 손가락 모두 크레파스로 물들어질 때까지 종이옷을 입히는 일을 거들었다.
선애네는 일하는 사람을 많이 둘 형편이 아니어서 온 식구가 매달려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기 공장에 놀러오라던 선애는 잘 나타나지 않았다.
"선애는 안 오나요?"
그러면 선애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놈의 지지바, 천둥벌거숭이처럼 돌아다니느라고. 지 언니 반만 닮아도 좋겠구만".
선애 언니는 하루 종일 집안일을 거들었지만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수줍음도 많이 타서 남들이 소리 내어 웃을 때도 방그레 웃기만 했다.
어떤 날은 색연필을 만들었다.
색연필이라고는 하지만 빨강과 파랑 두 가지 색 밖에는 없었다.
빨간색과 파란색 도료가 들어있는 큰 유리병에는 고무로 된 덮개가 씌워져 있었는데 덮개 중앙에는 색연필이 한 자루 들어갈 정도의 작은 구멍이 나있었다.
누런 종이로 둘둘 말려져있던 색연필을 그 구멍 속으로 집어넣었다가 빼내면 반들반들 윤이 나는 도료를 듬뿍 뒤집어쓰고 나왔다.
나는 색연필을 병에서 뽑아낼 때마다 뽁하고 나는 소리가 재미있어서 손 마디마디에 빨갛고 파란 도료가 묻는 것도 아랑곳 않고 색연필에 옷을 입혔다.
선애 언니는 지금은 품질이 좋지 않아서 고급 크레파스와 색연필을 쓰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살 수 없는 아이들만 값이 싼 이 크레파스와 색연필을 사서 쓴다고 했다.
그러나 곧 질이 좋은 물건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선애네 공장으로 향한 발걸음이 뜸해질수록 선애와 만날 기회는 더 많아졌다.
공장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선애였지만 학교와 온 동네를 부지런히 휘젓고 다녔기 때문이다.
선애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를 가리지 않고 놀았다.
공부를 안 한다는 것 외에는 줄넘기와 고무줄, 공기놀이, 땅따먹기는 기본이고, 남자아이들이 잘하는 구슬치기와 훈장 따먹기, 딱지치기, 팽이치기, 자치기…….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쪽 운동장에서 풀쩍풀쩍 줄넘기를 하고 있던 선애는 어느 사이엔가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구슬치기는 언제나 선애의 승리로 끝났다.
남자 아이들이 빈손을 털고 있는 동안 선애는 양 주머니가 불룩하게 구슬을 넣고는 의기양양하게 걸어갔다.
아이들이 자기를 구슬치기에 끼워주지 않으면 세모선 안에 넣어둔 구슬들을 슬리퍼를 신은 발로 꽉 찍고는 도망갔다.
달음박질도 얼마나 빠른지 날랜 남자아이들도 따라잡지 못했다.
더 이상 아이들이 따라오지 않으면 슬리퍼 밑바닥 구멍구멍마다 박힌 구슬들을 빼내면서 휘파람을 불었다.
여자아이들을 못살게 구는 남자아이들은 코피가 나도록 얻어맞았다.
어른들은 그런 선애를 보고 "저 천둥벌거숭이"라며 혀를 찼다.
내가 입던 옷을 선애에게 물려주기도 했는데,
"나는 마 이런 공주 같은 옷은 답답해서 몬입는 기라".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레이스 달린 원피스나 치마 같은 것은 손에도 대지 않고 내가 즐겨 입지 않았던 바지만 좋아라고 입고 다녔다.
그리고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언제나 입가에 웃음을 달고 다녔다.
늘 속으로만 꿍꿍 앓아대는 나는 선애의 그런 행동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나는 그림그리기와 책을 읽는 것은 좋아했지만 다른 것은 잘 하는 것이 없었다.
더구나 몸을 움직이며 뛰어노는 놀이에는 영 서툴렀다.
그래서 친구들이 줄넘기나 고무줄놀이를 할 때면 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구경만 했다.
선애가 줄넘기를 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난, 할줄 몰라".
그러나 선애는 손목을 잡아끌며 말했다.
"아이다.
니도 할 수 있다.
맨날 공주 같은 옷만 입고 가만히 있으니까 몬하는 거지. 내가 가르쳐 주꾸마".
혼자서 뛰는 줄넘기도 잘 못하는 내가 아이들이 양쪽에서 돌리는 줄넘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가 나온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뛰어 들었지만 계속 줄에 걸렸다.
"니는 마 빠지거라".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너거들은 첨부터 잘했나?"
선애의 한마디에 아이들은 꼼짝도 못하고 줄을 돌렸다.
"난, 도저히 못하겠어".
"아이다.
니도 할 수 있다.
언제까지 앉아서 구경만 할끼가. 하나, 두울, 셋하고 센 뒤에 뛰어들면 되는 기라".
"또옥 똑".
"누구십니까?"
"손님입니다".
"들어오세요".
"봐라 뭐라 카드노. 내가 된다 안카더나. 나올 때도 하나, 두울, 셋하고 세고 나오면 되는 기라".
"자알 가거라".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에도 나는 마음속으로 하나, 두울, 셋을 세었다.
"됐다.
됐다".
선애가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따라서 박수를 쳤다.
그 순간 나는 막 껍질을 뚫고 나온 나비가 햇살 속을 훨훨 날아오르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 날 이후로 선애는 몸을 움직이면서 노는 것들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다리를 높이 들어올려서 감아 밟는 고무줄놀이. 이제는 아이들이 머리높이까지 끌어올린 고무줄도 걸어감을 수 있게 되었고, 구슬치기도 그냥 굴려서 먹는 것이 아니라 남자 아이들이나 한다는 찍어 먹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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