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개혁은 가정교육부터(1)-부모가 변해야 교육이 바뀐다

입력 2004-01-01 13:45:53

새해에도 우리 교육의 앞길에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교육 당국과 학교에 대한 무너진 신뢰는 회복이 요원하다.

사교육에 기울어진 학생들은 스스로 일어설 줄 모른다.

공교육에 대한 원망이 쏟아지고 정책에 대한 비난도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교육의 대계는 가정에서부터 새롭게 짜여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모아 얘기한다.

대학입시와 과외에 매달리느라 가정교육이 실종된 지 오래다.

이래서는 교육 위기의 근원을 해결할 수 없다.

2004년 새해를 맞아 무너진 가정교육을 되살릴 수 있는 방안을 우리 현실과 해외 사례에 비추어 모색해 본다.

◇성적이 모든 평가의 기준

"고3 생활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우습게도 수능시험을 치르고 나서입니다.

시험을 망쳤다는 얘기에 가끔씩 보이던 아버지의 인자한 미소는 사라졌고, 엄마는 몸져 누웠습니다.

누나들은 일년 동안 우리가 얼마나 숨죽이고 살았는데 하며 원망을 해댔습니다".

수능시험 직후 재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한 고3생은 '몰락한 왕이 다시 추대된 꼴'이라며 씁쓸해했다.

앞으로 일년 동안 다시 왕처럼 대접받겠지만 다시 웃음과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하는 가족들은 얼마나 지옥이겠냐며 고개를 떨궜다.

우리나라 학부모들은 대부분 자녀 교육의 결과를 대학 진학으로 평가한다.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남들이 그렇게 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학 입시에 연연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성적'으로 재단하는 습관이 들었다.

같은 아파트, 같은 동네의 또래들 가운데 성적 좋은 집 아이의 생활은 모든 가정의 기준이 된다.

다니는 학원, 배우는 과목, 읽는 책, 심지어 사소한 습관까지도 비교의 대상이 된다.

공부만 잘 하면 모든 허물이 용서되고, 공부를 못 하면 다른 일을 아무리 잘 해도 칭찬받기 힘들다.

◇방치되는 어린이, 보호받는 입시생

조기교육 열풍으로 어린이들은 이미 세살, 네살 때부터 학원에 다닌다.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다녀야 할 학원이 한두 개가 아니다.

대학 입시를 향한 긴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부모들은 자녀를 어딘가에 보내는 것으로 할 노릇을 다 했다고 여긴다.

선진국에서는 어떨까. 미국이나 영국, 일본 등지에 가 보면 우리와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길에서 혼자 서성이는 어린이를 보기 힘들다.

스쿨버스는 부모가 기다리지 않는 학생을 그냥 내려주는 법이 없다.

스쿨버스가 없는 학교라면 부모가 데리러 올 때까지 교사가 데리고 있는 게 보통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선 어린이를 승용차에 두고 내렸다간 벌금형을 받기 십상이다.

골목이나 길거리에서 뛰노는 어린이는 볼 수 없다.

놀이터에, 그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엄마나 아빠가 벤치에 앉아서 지켜보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 어린이들은 참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이다(?). 초등학생만 되면 혼자 아파트 문을 열고 들락거릴 줄 안다.

학교도 혼자 다닐 줄 알아야 "우리 애 다 컸네"라는 칭찬을 듣는다.

맞벌이 부부의 자녀라면 시간 맞춰 학원에 다니는 정도는 혼자 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하는 고등학생이 되면 아침부터 승용차로 모셔진다.

자녀를 일찍 등교시키느라 회사 출근이 아주 이른 아버지가 많다.

밤늦게 자녀를 태우러 가기 위해 음주운전도 마다 않는다.

아예 운전을 배우는 어머니도 적잖다.

◇학부모는 교육 주체가 아니다(?)

학교와 교사에 대한 존경심이나 자발적인 참여 의식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한 초등학교 1학년 담당 교사는 "청소나 급식, 환경 정리 등에 학부모들의 참여가 필요한데, 학교에 와 달라고 하면 뭘 바라는 것처럼 여기는 엄마들이 많아 괴롭다"고 했다.

그는 "스승의 날이나 명절 전후로 학교에 와서는 봉투 하나 쥐어주며 잘 부탁한다고 하는 게 부모 역할의 전부인 양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다"고 했다.

선진국들의 사친회(PTA)를 보면 우리 교육이 어디서부터 무너지고 있는지, 어떻게 세워야 할 지 가늠해볼 수 있다.

모였다 하면 돈 얘기, 학원 얘기로 일관하는 우리 학부모들과 달리 선진국 부모들은 직접 교육현장에 뛰어든다.

일본의 경우 학부모회의를 통해 청소, 등.하교 지도, 놀이터 순찰 등의 활동에 부모들이 직접 참가하는데, 빠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독일에서는 반별 혹은 클럽별로 학부모들이 모이고 1년에 한 두 번은 학교 책임자를 불러 교육내용을 묻고 학부모들의 의견을 반영시킨다.

PTA가 법제화돼 있고 전국 규모로 결성돼 있는 미국의 경우 구성부터 우리와 다르다.

교사, 학생, 학부모, 일반인까지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학부모회는 수업 참관은 물론 수업 담당까지 학부모가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야외 체험학습에는 학부모가 인솔 역할을 자원하는 게 보통.

"시간이 있다면 시간을 기부하는 게 원칙이고, 돈은 있지만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돈을 기부합니다.

도서관 정리, 급식 보조원, 행사 일꾼 등 모든 학교 활동에 학부모들이 자원봉사를 합니다.

정규 교육활동에서도 교사와 함께 일하는 학부모들이 많습니다".

학부모회 연구를 위해 미국에 다녀온 적이 있는 정만진 교육위원은 "봉사하고 기부하면서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는 모습, 당당히 학교 교육의 주체로 참여하는 학부모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가정에서는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는다

대구의 한 학원 관계자는 "지각생들은 학원 입구, 그것도 길에서 매를 때린다"며 학원의 엄격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학생이나 학부모들의 반발이 없느냐고 묻자 "학교서는 반항하거나 신고할 지 몰라도 학원에서는 그렇게 해 주면 오히려 좋아한다"며 "어떤 학부모는 집에서 못 때리는데 학원에서 좀 엄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기도 한다"고 했다.

오랜 전통으로 내려온 우리의 가정 교육은 십여 년 사이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다.

한둘뿐인 자녀의 '기'를 꺾지 않기 위해 버릇이 없어도 그냥 내버려둔다.

아기때부터 '굿 나잇' 인사만 던지고 나면 아무리 울어도 혼자 재우는 외국의 엄마들을 두고 '애정이 없다'며 비판한다.

잠자리를 봐 주고, 옷을 챙겨주고, 밥까지 떠먹여준다.

저녁 내내 TV 앞에,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그저 나무라거나 방치할 뿐 참을성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교육은 학교에서, 학원에서 하는 것'이란 사고방식이다.

그러면서 자녀 앞에서 서슴없이 학교를 욕하고 교사들을 비난한다.

이래서는 대학 신입생들이 "내가 배워야 할 모든 것은 학원에서 배웠다"고 농을 던지며 가정을 '학비와 용돈 대 주는 곳'으로 여기는 현실이 달라질 수 없다.

초등학생들끼리 담임 교사와 친구 엄마의 잘못을 떠들어대는 어처구니없는 세태가 나아질 수 없다.

세계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바뀌는 오늘, 부모들부터 자녀 교육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일이 더욱 시급하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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