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 기자가 본 세상이야기-피곤한 아이들

입력 2003-12-30 09:04:25

"사교육, 당신의 아이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초등학생인 딸아이가 난데없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짐작에 TV 공익광고 문구인 것 같아 저도 한 소리 했습니다.

"네가 얼마나 행복한 아이인줄 아니? 좋은 엄마 만나서…".

이곳저곳 억지로 학원에 보내지 않으니 고마운 줄 알라는 얘기였습니다.

아이도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얘기를 하고 보니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의 행복을 억지로 학원에 많이 안 보내는 걸로 표현하다니….

정말이지 요즘 아이들은 피곤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한 아이는 얼마전 발작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인 그 아이가 받고 있는 사교육은 손으로 꼽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영어, 수학, 글짓기, 미술, 피아노, 바이올린, 수영…. 그 아이는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엄마가 먹을 것을 챙겨 차 안에서 간단히 허기를 때우며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비단 이 아이뿐만이 아니지요. 사교육을 2, 3가지 이상 받는 게 보통인 요즘 아이들은 초등학생조차 밤 9시가 넘어야 모든 일정이 끝나는 경우가 적잖습니다.

자녀가 배우는 게 너무 많아 엄마들이 과외 그룹을 짜려고 해도 시간 맞추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어떤 학부모들은 축구, 농구 같은 스포츠 과외도 개인 교사를 불러 시킨다고 합니다.

농구는 아이들의 키를 키우는데 좋고 축구도 돈 주고 배워야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데 이해가 된다는 겁니다.

1인당 월 50만원 이상 하는 개인 과외를 받는 초등학생도 있을 정도입니다.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조기 유학을 떠나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요즘엔 미국, 캐나다 등 비용이 많이 드는 나라 대신 필리핀이 인기가 높다고 하는군요. 같은 돈이라도 가정부까지 들여 편하게 지내면서 영어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교육들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 것일까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회의가 들 때가 많습니다

한 교사는 "부모들이 직접 교육하는 모습을 지켜볼 정도로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의 비위를 맞춰주며 돈 벌기 쉽다"는 얘기까지 합니다.

너도 나도 사교육에 열을 올리는 현실에서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를 그냥 놔두기도 힘든 게 사실입니다.

내 아이만 뒤처지는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게 되니까요. 저도 한번씩 이런 걱정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해보겠느냐고 물으면 딸아이는 "엄마랑 같이 할래요"하는 대답으로 힘을 빼놓습니다.

엄마가 대단한 실력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요.

그런데 딸아이의 말이 틀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대다수 엄마들이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할 일을 했다"는 위안을 삼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한 주부는 "부모가 공부를 제대로 못한 데 대한 대리 만족을 채우려는 부분이 큰 것 같다"는 말도 합니다.

언젠가 딸아이를 한 교육기관에 보내면서 아이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잡담으로 시간을 때우는 엄마들의 모습을 보며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거짓말 보태지 않고 한달동안 책을 읽으면서 기다리는 엄마는 단 한 명밖에 없더군요.

과연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요. 겨울방학동안 아이의 교육 계획을 짜느라 분주한 엄마들이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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