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포럼-미국의 선택

입력 2003-12-30 09:04:25

서부영화는 용감한 보안관이 고생 끝에 드디어 현상금이 걸린 악당을 잡는데서 끝난다.

그러나 역사는 후유증이 일파만파로 퍼져 계속 전개된다.

미국의 이라크전쟁 목적은 대량살상 무기의 제거가 아니라, 이라크를 말 잘 듣는 일본처럼 길들이고 미국의 세력권에 편입시키기 위해서였다.

제2차 대전 후 미국은 일본을 점령, 민주화시키고 유력한 친미국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 경험을 이슬람권의 대국 이라크에 적용시켜 미국의 책봉체제에 편입시켜 중동 전체를 좌지우지하고, 나아가 팔레스타인 문제까지도 자기 뜻대로 전개하려고 한다.

동북아시아의 일본, 중동의 이라크를 양날개로 제국의 꿈을 이루려는 세계전략이다.

'이라크의 일본화'라는 보도를 접한 일본인들은 야릇한 쓴웃음을 지었다.

각 민족에게는 기본적 가치관 즉 원형이 있다.

원형은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민족마다 독특한 개성이 있다.

고대 중국인이 일본인을 왜(倭.순한 모양 왜)라고 이름지은 것은 일본인의 집단적 행동양식이 지도자의 명령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따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일본인의 자녀 교육의 표어는 '가시코이'로, 한자로는 可(가), 畏(외), 恐(공) 또는 賢(현)으로 쓰는데, 위(上)를 두려워하며 자신의 분수를 지킨다는 뜻이다.

2차대전 후 패전에 통분하고 할복자살한 사람은 있었지만, 미군 암살 사건은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점령군의 최고 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신사를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을 정도로 모범적인 피점령국민이었다.

오늘날 10년 이상이나 계속되는 경제불황 속에서 한 해 3만명 이상의 자살자가 나왔지만 제대로 된 데모도 한번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일본인의 倭(왜)적인 원형을 볼 수 있다.

한편, 아랍인은 사막의 모래에 비유될 만큼 단결심이 약하고 자기주장이 강하다.

엄한 계율 속에서 유일신을 받드는 백성으로, '구약성서'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생활신조로 삼는다.

일본인처럼 '힘센 것은 모두 신'으로 삼아 이른바 800만개의 신을 모시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정신 세계에 살고 있다

이렇듯 일본과 이라크의 원형은 완전히 대조적이다.

무엇보다도 이라크인에게는 십자군 전쟁이래 집단 무의식에 각인된 서구에 대한 증오심이 있다.

그런데 미국은 이들이 일본인처럼 하기를 기대했으니 실패는 당연하다.

물론 이라크인도 인권의 신장, 합리적인 생활을 바라고는 있다.

그러나 그들이 전통이나 자존심을 버리고 강요된 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데, 미국은 자신의 오만함에 대한 자성도 이라크인의 원형에 대한 이해도 없었다.

부시정권의 정책 입안자들 중에는 내로라하는 최고의 브레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모여 짜낸 정책은 상대의 원형을 무시한 군사력 우선의 일방주의인 것이다.

아무리 지식과 정보를 많이 갖고 있어도 사고(思考)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맴돌며 그 틀에서만 상대를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은 원형대로 지난날 미대륙의 원주민을 '싹쓸이'하고 이상적인 민주사회 건설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문명충돌을 과대포장하여 21세기의 패권을 차지하려 했으나, 이라크 전쟁의 결과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열명이 지켜도 하나의 도적을 막을 수 없다는데, 전근대적인 족속이라고 여기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정보, 과학, 기술의 발달은 테러를 더욱 용이하게 했고 어떤 방어수단도 완벽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은 현시점에서 두 가지 역사적 경험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마셜플랜으로, 2차대전 후 마셜의 주동 아래 비군사적 수단으로 인권신장과 함께 경제부흥에 역점을 두고 민주주의 진영을 강화시켰다.

마셜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미국은 국가적 위상을 높혀 세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다른 또 하나의 경험은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 농민 한 명을 죽이는데 수십만 달러를 소비하고도 국가 위신을 땅에 떨어뜨린 악몽이었다.

부시정권은 모든 잠재력을 군사적 수단에 투입, 무력만을 과시하려 하는데, 그 결과는 국가적 위상의 권위의 실추로 이어질 것이다.

세계는 상호 원형을 이해하는 공존의 국제질서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마상(馬上.군사력)으로 잡은 정권은 군사력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동양의 지혜를 되새겨야 할 때다.

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