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년 1차 몽고침입=몽고 사신 저고여가 국경지대서 피살됐다.
그가 싣고 가던 공물을 노린 도적의 짓이었다.
몽고는 이를 이유로 국교를 단절하고 고려를 침입했다.
고려는 몽고의 대군을 막아내지 못해 화친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몽고는 군대를 철수하는 대신 서북면 40여성에 민정감찰단인 다루가치 72명을 파견했다.
그들은 과중한 공물을 요구했고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고압적인 자세는 누그러들지 않았다.
고려는 화친하려던 태도를 바꿔 몽고에 단호히 대처하기로 했다.
최씨 정권은 강화도 천도를 단행했다.
▲1232년 2차 몽고 침입=몽고는 다시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고려를 내침하였다.
수전에 약한 몽고군은 강화도로 진격하지 못했다.
강화도를 제외한 고려 전역은 몽고군에게 무방비상태에 노출됐다.
초조대장경이 몽고군에 의해 불탔다.
▲1235년 3차 몽고침입=고종 22년부터 26년까지 5년에 걸쳐 전란이 일어났다.
몽고군은 경상도까지 압박해왔다.
전쟁 종식을 희구하며 고종23년부터 팔만대장경 조판사업이 시작됐다.
고종 25년 황룡사가 몽고군에 의해 불탔다.
계속된 몽고의 침략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민생은 극심한 곤란에 빠졌다.
대규모 투항민이 생겨났다.
▲1247년~1253년 몽고의 4,5차 침입=몽고군은 개경 및 강화연안까지 밀고 들어와 강화도 정부를 위협하였다.
몽고군은 8월 이후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 방면으로 남하, 그곳의 여러 성의 공격하면서 남부지역에까지 이르렀다.
5차 침입은 원의 새 황제 현종이 즉위하자마자 시작됐다.
몽고군은 동주.충주.양근성.천룡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남하한 몽고군이 10월경 충주성을 집중 공격했다.
방호별감 김윤후와 충주민들이 성을 사수하여 몽고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1254년 몽고 6차 침입=종래 본토 내륙에 대한 공성전(攻城戰)만을 구사하던 몽고군이 적극적으로 해안의 섬을 침공을 시도하는 전략상의 변화를 보였다.
▲1270년=고려 원종이 개경환도를 결정했다.
39년 강화시대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배중손과 노영희 등은 삼별초군을 인솔, '환도거부' '몽고에 항전'을 결의했다.
삼별초군은 이후 진도, 탐라 등으로 근거지를 옮겨 다니며 여.몽 연합군에 저항했다.
1273년 완전 진압됐다.
*고려의 대인관계
고려시대는 유달리 다른 민족의 침입이 잦았다.
당시 대륙정세가 불안정했고 그 파장이 고려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대체로 고려 때에는 북방의 유목수렵 민족인 거란과 여진, 그리고 몽고가 차례로 일어나 중원의 한민족을 압박하고 대륙을 장악했다.
북방민족의 등장은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역학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고려는 건국 이후 오대로부터 송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왕조와 친선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송나라와는 문화와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에 반해 북방민족인 거란이나 여진, 그리고 몽고를 야만시하고 대립정책을 폈다.
북방민족들이 크게 일어나 중원에 진출했지만, 고려는 임기응변으로 대처했을 뿐 이들을 외교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고려의 이같은 대외정책은 국제정세를 파악하고 내린 결과라기보다 고려 내 정치가들 사이의 이해관계에 의해 결정됐다.
결국 몽고와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 끝에 대몽항쟁은 종식되고 원간섭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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