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은 나의 애인이다.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만나면 그냥 좋고 헤어지면 또 만날 날을 생각나고. 내가 사랑에 완전 미친놈이라고 보면 된다.
오늘 백두대간 종주 두번째 산행에 나섰다. 저녁 11시쯤 길동전철역부근 청산학원앞에서 청산학원이 제공한 관광버스로 지난 산행에 이어 또다시 지리산으로 이동했다.
회사에 일거리가 생겨 토요일인데도 오후 6시까지 직원들과 함께 있다가 고양 화정집에 들러 약속시간에 맞춰 그 장소에 가니 시간이 빠듯했다. 서울지역에서는 끝과 끝이다. 마누라와 딸은 헐레벌떡 집에 들어와 서둘러 짐을 꾸려 나가는 내가 당연한 것처럼 별다르게 생각안하는 듯했다. 주말에는 집에서 식구들과 자주 놀아주어야 하는데 미안합니다. 각자 인생이 있으니. 한심하죠.
한편으로 마누라와 자식들이 불평하지 않도록 교육을 잘시켜 놓았다고 볼수도 있나. 이런 얘기하면 벌받는데. 하여튼 늘 가족들의 배려로 나는 마음대로 산에 갈 수 있고. 내 멋대로 산다. 고마움을 알고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데 언제 철이 들지. 식구님들 감사합니다. 앞으로 평소에 잘할게요. 초등학교 1학년인 예쁜 우리 딸이 입에 달고 다니는 말. ".우리집은 행복한 가정. 아이 행복해". 해준 것도 없는데 너무 고맙다. 어떤 부모들은 마누라하고 자식들한테 너무 잘해주고도 인정을 못받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나는 돈도 못벌어주고 같이 놀아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인정을 받으니. 이것이 요즘 무한경쟁시대에서 흔히 말하는 '저비용 고효율'의 가정관리법. 이런 얘기하면 또 벌받지. 반성할께요. 천천히.
나는 집을 나서자마자 종로5가 성희산악집에 가서 12만원짜리 방수 등산화와 장갑, 스패치, 아이젠등 18만원어치의 겨울장비를 구입했다. 동계 완전준비를 마쳤다. 이제 더 이상 돈이 들어가지 않겠지. 지난번 60만원에 이번까지 총 78만원의 비용이 들었다. 역사적인 백두대간종주에 나서는데 등산장비에는 돈을 아끼지 말자. 집한채 값에 비하면 얼마되나. 껌값이다. 비교할 곳에 비교해라. 이헌태야. 그런 식으로 살면 마음이 편하니. 어쨌든 앞으로 최소한 5년동안 등산장비구입에 돈한푼 들어가지 않아야 하는데. 잘 써야지.
종로5가에서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오후 9시반쯤 길동역사거리에 내렸다. 거리는 매우 먼 것같은데 지하철은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역시 지하철. 지하철화이팅. 나를 포함 유영래선배, 심상준총무등 미리 도착한 일행들은 약속장소 맞은편 감자탕집에서 감자탕을 곁들여 소주잔을 걸쳤다. 두번째 산행에 대한 기대에 부풀면서 얘기꽃을 피웠다. 소주병이 다섯병을 넘어섰고 나는 이미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옛날에는 감자탕이 순대와 더불어 구리한 냄새 때문에 내 입에 맞지 않았는데 근래에는 감자탕이 왜 그렇게 맛있는지. 아마 삶의 무한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때문이 아닐까. 요즘 동네 식당에도 맛있는 집이 많이 늘었다. 맛없는 식당을 열었다가는 바로 문닫을 수 밖에 없는 세상. 맛있으면 차를 타고 멀리 가서도 먹는 세상. 무서운 세상이다. 인정사정 볼것없는 살벌한 사회다. 실업자는 많이 늘어나고 딱히 먹고 살만한 게 없고 만만한 게 식당이라고 식당장사경쟁이 가장 불꽃을 튀기게 되었고 그 결과로 맛이 더욱 향상된 대표적 케이스. 실업자가 늘수록 맛이 향상되는 감자탕. 말도 잘 만든다. 그러면 실업천국이 되면 감자탕의 맛이 신의경지에 들어간다는 말이되는데.
우리일행 15명은 여느때처럼 중부고속도로를 경유해서 진주-대전간 고속도로를 통해 지리산으로 향했다. 오늘은 백두대간종주에 새로 참여한 신입회원들이 5명이나 되었다. 잠시나마 버스안에서 이들을 포함 각자 소개도 하고 노래자랑도 하고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잠깐 각자소감을 들어보자.
탁무권 선배는 " 이번에 종주를 시작하면서 인생의 목표가 생겨 기쁘다"고 말했고 허정균 선배는 "조국의 엘리트들이 조국의 땅을 먼저 알고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또 여러 사람들이 "끌려 나왔다". 그냥 따라 나왔다", "고향가는 길이다"라는 얘기도 했지만 속마음은 들떠고 흥분되었으리라. 다 맞다. 의미란 원래 사소한 데서 거창한 것까지 복합적이다. 모 선배는 핸드폰에 전송되어온 작고한 고정희시인의 '지리산의 봄'을 읽어주려다가 끊겼다. 몇차례나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다음부터 준비는 철저히. 알겠어요. 시대의 아픔을 고민하며 좋은 시를 많이 남겼던 고정희시인은 지난 91년 43살의 나이에 지리산 뱀사골에서 사고로 사망해 고시인과 지리산은 참으로 인연이 깊은 모양이다. 그토록 아꼈던 그 지리산에 영원히 묻힌 것이다.
지리산과 관련된 시라면 이성부씨의 시가 가슴에 더 다가온다. '지리산' 시집중 서시 '산경표공부'는 다음과 같다.
"물 흐르고 산 흐르고 사람 흘러. 지금 어쩐지 새로 만나는 설레임 가득하구나. 물이 낮은 데로만 흘러서 개울과 내와 강을 만들어 바다로 나가듯이. 산은 높은 데로 흘러서 더 높은 산줄기들 만나 백두로 들어간다. 물은 아래로 떨어지고 산은 위로 치솟는다. 흘러가는 것들 그냥 아무 곳으로나 흐르는 것 아님을 내 비로소 알겠구나! 사람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들 흘러가는지. 산에 올라 산줄기 혹은 물줄기 바라보면 잘 보인다. 빈 손바닥에 앉은 슬픔 같은 것들 바람소리 솔바람소리 같은 것들. 사라져버리는 것들 그저 보인다." 흘러가는 물과 산, 사람과 인생. 자연의 이치와 순응, 무념무상이 필요한 듯하다.
맨날 '양반론'을 꺼집어내며 공자 같은 소리만 하는 유영래선배. 그는 왕휘지 얘기를 꺼냈다. 왕휘지는 4세기경 진나라때 서예를 예술의 경지로 올려 서성(書 聖)이라고 불렸던 왕희지의 아들이다. 모두 당대의 서예가였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부전자전. 잘한다 왕씨가족. 다음은 유선배의 말씀. "어느날 왕휘지가 갑자기 친구가 보고싶어 말을 타고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그 집대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갑자기 만나고 싶은 흥이 죽어버린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잖아. 친구를 만나지 않아도 그 기쁨을 이미 만끽했기 때문에 굳이 만나 의례적인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선방의 선승처럼. 우리도 이처럼 남들이 백두대간종주를 하니 덩달아 간다, 아니면 기록을 남겨야 한다 이 같은 마음을 버려야 한다" 경상도 말로 "내키는 대로 살자. 다른 말로 쪼대로 살자"는 것이리라. 사실 말은 맞다.
나중에 내 차례가 되어 이 말에 박살을 냈다. "노자는 아는 체하지 말고 잘난 척하지 말라고 했지만 요즘 세상에 그렇게 살다가는 실업자 신세를 면키 어렵다. 지금은 '자기피알시대'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도 피알을 잘해야한다. 독종이 아니면 산에 가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비우는게 보통이다. 그렇다면 한사람이라도 더 인간을 만들기위해서는 한사람이도 더 산에 데리고 가야한다. 따라서 다음카페 '백두대간 한걸음 이어가기' 사이트를 더욱 홍보해야 한다. 그리고 남들이 백두대간 종주해보면 너무 좋다고 하면 우리도 당연히 따라해야 한다. 남들이 좋아하면 나에게도 좋은 것이고 남들이 싫어하면 나에게도 싫은 것이다. 100%도 맞지 않아도 대충 맞다. 그것이 인생이다 "며 톤을 높여 얘기했다. 또 "유선배는 노자시대에 태어나야 했는데"라고 덧붙이면서 그러나 이런 얘기하면서도 속으로는 사실 유선배의 말이 백번 천번 맞다고 생각한다. 일부러 웃자고 한번 대든 것이다. 산은 늘 겸손하게 가야 한다고한다. 그것이 산이 가르쳐주는 덕목일 것이다. 늘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 유선배.
박수.
이날 고속도로를 통해 남도로 향하면서 기가막히는 일인지는 몰라도 박장대소한 일이 있었다. 금산의 인삼랜드 휴게소에 들렀다. 볼일(?, 절대로 보는 일이 아님)이 있어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안쪽문에 고속도로관리공단의 '우리 문화 영어로 표현하기'라는 액자형태의 부착물이 붙어있었다.
그런데 우리 문화로 적힌 게 뭐냐하면 바로 폭탄주였다. 폭탄주 괄로해서 Bomb drinking이라고 쓰여있었다. 내가 알고있는 영어표현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황당했다. 폭탄주가 우리문화로 지정되어 있었다. 다시말해 폭탄주는 전통주 내지 민속주 취급을 받은 셈이다. 외국사람들에게 알릴 우리 문화가 그렇게 없어 폭탄주를 적어놓았을까. 인삼 많이 먹더니 머리가 너무 비상해져서 이상해 진 것 아닌가 싶었다.
솔직히 지난 15년 폭탄주를 너무나 너무나 애용했던 나는 그렇게 거부감은 없었다. 피씩 웃음이 나왔을 뿐이다. 부착물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군에서 유래되어 민간에까지 퍼지게 된 술로 과격음주라고 할 수 있는데 맥주같이 도수가 낮은 술에다 소주나 양주같이 도수가 높은 술을 넣어 한꺼번에 마셔버리는 것이다". 밑에 친절하게 영작해 놓아두었다. 전체소개는 생략 하고 마지막 표현만 전한다 " ----. Then it is drunk in one shot." 특히 원샷이 인상적이다. 중국교포들은 이를 "딱딱 땁시다"라고 한다는데. 부착물 바로 밑에서 우리모두가 질리도록 들은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문구도 당연 있었지만.
폭탄주를 우리문화로 선정한 모회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니 자랑스럽게 홍보를 해놓았다. "고속도로 휴게소를 찾는 내/외국인 고객들을 위한 우리 전통문화를 소개하고 이를 통한 한국의 이미지 향상과 함께 영어표현법등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여 생각하는 문화공간의 역할을 기대합니다". 외국사람들이 폭탄주가 과연 무엇인지를 알고 나면 한국의 이미지가 향상될까. 알코올 중독자들인가 아니면 시인 이태백과 같은 풍류가들인가.
하여튼 고속도로 관리공단이란 공기업에서 우리 문화로 지정한 폭탄주를 더욱 애용하고 범국민적 술로 만듭시다. 모 방송에서 폭탄주 없애자고 몇 년마다 대대적으로 보도해도 소용이 없다. 이제 그 이유를 알았다. 전통 민속주가 그렇게 해서 없어질 수 있나.
내가 보기에도 폭탄주가 우리나라가 내세울 만한 문화로 선정된데 대해 어느정도 수긍이 간다. 전혀 근거없는 얘기가 아니다. 지금 내가 누구 편을 드나.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최대의 수출품이 폭탄주이고 룸싸롱이다. 한국은 70년대 가발,가방수출을 해서 돈을 벌었고 지금은 반도체나 휴대폰, 자동차수출로 돈을 벌고 있다. 시대마다 효자품목이 다 달랐다. 폭탄주와 룸싸롱 수출은 무역흑자,적자에 영향을 주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한국이 자랑하는 수출품이다.
우리나라 상당수 국민들이 애용하는 폭탄주는 우리 창작물이 아니다. 19세기후반 영국노동자들이 비싼 위스키를 마실 수 없어 맥주와 섞어 마셨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20세기초를 배경으로 아버지와 두아들간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유명한 미국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에서도 폭탄주 제조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지금 폭탄주를 가장 애용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사실 한국에서 마시는 폭탄주의 재료인 위스키의 원액도 전량 수입한다. 영국과 미국의 고급위스키회사들이 가장 큰 고객인 한국 국민들이 그렇게 귀엽다나. 그 높은 사장님들까지 우리나라에 세일즈하러 오니 참으로 대견하다. 영국일반시민들도 발렌타인 같은 고급 술은 구경도 못하는 모양이다. 발렌타인 생산량의 3분의 1이 한국에서 소비된다. 한국은 위스키시장의 수입4위국이다. 전통주와 민속주, 막걸리가 통곡한다. 이와에 위스키를 슬그머니 우리 민속주로 등록시켜. 안되지.
간혹 드물지만 12년도 아니고 17년도 아니고 21년도 아니고 발렌타인 30년에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는 나라다.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개그콘서트의 '청년백서'코너를 빌려 "한국을 세계 제1의 폭탄주국가로 임명합니다". 미,소 세계강대국들이 핵폭탄을 갖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세계제1의 폭탄주를 갖고 있다. 말이되나. 폭탄은 같은 폭탄인데. 마시면 속에 폭탄이 투하되어 속이 뒤집어질 뿐이지만 말이다.
이처럼 폭탄주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대게 1970년쯤 폭탄주가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 이후 짧은 세월에 급속하게 국민 애용주로 확산된 뒤 세계수출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수출이 기반이 된 한강의 기적, 다시한번 이뤄냅시다. 근데 요즘 아줌마나 학생들도 폭탄주가 유행이라는데. 맞는가. 마셔볼 기회가 없어서.
재계, 정계,관계에서는 대체적으로 폭탄주의 시초를 박희태 한나라당 국회의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분이 70년대 춘천지검장시절 폭탄주를 제조했으며 그것이 군으로 전파되었고 결국 민간으로까지 확산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과거 군스타일에는 폭탄주가 제격이었을 것이다.
내가 박의원에 직접 들은 내용도 그와 비슷하다. 특히 그에 따르면 지역구에 갈 때는 폭탄주가 최고라는 것이다. 지역구에 가면 많은 사람들과 접촉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사람씩으로부터 술을 받아 마시다가는 죽는다. 그래서 폭탄주를 통해 쭉 한잔씩 돌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폭탄주는 윗사람들이 아랫사람들에게 쭉 돌리는 고위층용,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해야하는 즉, 시간이 급한 사람용이 있을 것이다. 폭탄주는 골프주, 사정주, 충성주, 타이타닉주등 종류도 50여가지 이상이다. 생략한다. 어느날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폭탄주가 경제적 효용이 있다는 석사논문도 있었다. 정말 술이라면 세계에 남부럽지않는 나라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술집아가씨를 옆에 끼고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노는 룸싸롱은 내가 알기로는 우리나라 창작품이다. 이제는 미국, 일본, 중국은 물론 특히 몽고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등의 중앙아시아지역까지 확산되어있으며 각국의 초대형 룸싸롱업소는 모두 한국인이나 한국계 사람들이 운영한다고 한다. 자랑스러운(?) 나라다. 아직 일본이나 중국에서 대중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들을 포함 아시아각국에서도 폭탄주가 서서히 보급되어 가고 있는 모양이다. 곧 폭탄주와 룸싸롱이 한국김치나 한국인삼보다 더 빨리 세계적인 히트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최근 KBS일요스페셜을 보니 한국인삼은 세계시장에서 미국,캐나다의 서양인삼에 완전 밀렸더구만. 큰일이야
괌과 사이판이 막 개발되기 시작한 8년 전에 이들 지역을 가본적이 있다. 한국룸싸롱이 재빨리 진출해 있었다. 그때 사이판에 가보았던 '김치룸싸롱'가게는 요즘도 있는지. 하여튼 폭탄주와 룸싸롱을 세계만방에 퍼뜨리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역시 가무민족의 후손에 걸맞다. 다시한번 개그콘서트의 '청년백서'를 빌리면 "한국을 세계제1의 가무의 민족으로 임명합니다" 좋은 게 아니니 고칩시다. 건전한 가무의 민족으로 바꿉시다.
백두대간에 웬 폭탄주. 산 좋아하는 사람치고 술 싫어하는 사람없다. 다음에 산과 술에 대한 얘기를 더하고 일단 끝.
우리 일행을 태운 관광버스가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운전석 뒤에 앉은 나는 차 헤트라이트 불빛에 비쳐 드러난 고속도로와 차들의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길만 보였다. 길이 끝없이 이어져있다. 길이란 무엇일까.
길 도(道), 노자나 신선들이, 고승들이 그렇게 수행 정진했던 '도 닦는다'는 뜻에서도 이 길도가 쓰인다. 노자와 장자가 도(道)를 갖고 연구한 도가(道家)가 있다. 이를 단순무식하게 연결하면 도 닦는다는 것은 길에서 해야 한다. 혹시 우리일행을 태운 버스를 운전하시는 운전기사가 도사가 아닐까. 100년후 다음 퀴즈를 냈을 때 몇 명이나 맞출까. 도사(道士)가 무슨 뜻입니까. 1) 도로건설을 담당하는 고위급인사 2) 도로위를 달리는 운전기사 3) 우주와 세상의 이치를 연구하고 이를 행하는 사람 4) 도사견의 준말. 아마 답이 1번 내지 2번이 많지않을까.
누군가 부처님을 가르켜 몸과 마음을 고치는 당대 최고의 의사이며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가도록 가르치는 당대 최고의 선생이라고 말했다. 운전사도 우리 일행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태워다 주니. 운전사도 도사급이 아닌가. 논리의 비약이 심해서 죄송합니다.
철학적으로 수준을 조금 높이죠. 도란 원래 길을 뜻하죠.모든 사람과 사물,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이므로 특유의 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도는 한번은 음하고 한번은 양하는 성격을 갖고 있데요. 그래서 사물의 매커니즘은 음양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죠. 이것이 바로 '주역'이라고 하네요. 주역을 쬐금 아는 친구에 의하면 '운7 기3'이라고 하네요. 사주팔자와 운명이 대략 70%이고 나머지 30%는 자신의 노력에 달렸다고요. 맞나 모르겠네요. 제 생각에는 '운3 기7'이 맞는 것 같은데.
하여튼 길이 곧 도네. 그러면 확실한 도인이 있지요. 길거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청소부아저씨. 거의 신선의 경지에 들어갔겠구만. 실제로 하는 일도 보면 거리를 깨끗이하는 청소부아저씨들이 성인처럼 너무 너무 훌륭하죠. 성인들은 사람의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고 청소부아저씨들은 사람들이 사는 거리를 깨끗이해주니까. 같은 반열이네. 나도 다음 세상에 만약, 만약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면 도인이 되든지, 청소부아저씨가 되든지. 잘못 태어나 이도 저도 아닌 거리를 불쾌하게 만드는 거지로 태어난다구요. 더 착한 일해서 좋게 태어나야죠.
질문하나. 외도(外道)도 도인가. 사전에 찾아보면 1)정도를 어김 2)오입 3)경기도 이외의 다른 도 4)불교이외의 다른 도로 나와있다. 요즘 2번이 가장 흔하게 쓰인다. 최근 세태에서는 외도가 정도로 바뀌고 있다는데. 사실 김영삼정권과 김대중정권을 통해 30년이상 찬밥신세였던 민주화세력이 10년이상 통치하면서 해방후 권력이 뒤바뀐 사례가 있는 것으로 봐서 혹시 그렇게 될 가능성은 전혀없는가. 그것하고 경우가 다르다고요.기대할 걸 기대하라구요.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렇게 막가는 세상은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구요. 꿈깨라구요. 알겠습니다.
길에 대한 철학적 상념에 빠지면 한정없다. 길거리에서 도를 닦는 사람은 없지만 길은 인생의 깊은 의미를 듬뿍 담고 있다.
길에도 종류가 많다. 어마어마한 길도 있다. 천국의 길, 동양과 서양을 연결시킨 실크로드, 손오공과 함께 불경을 가지러 천축에 갔다온 삼장법사의 길도 있다. 인도를 순례하고 온 신라승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길도 있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의 길도 있다. 또 주옥 같은 노래인 '마이웨이', '삼포로 가는길' 에서부터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못한 길'이란 시까지 있다.
'가지못한 길'이란 시는 나의 좌우명 '인생은 추억쌓기'라는 말과 너무도 일치해 늘 흥분을 느낀다.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볼 수는 없어-----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고."
국민여러분, 하고 싶은 것은 다해보고 죽읍시다. 나중에 후회합니다. 물론 사회에 해악을 끼치거나 남의 가슴에 못질하는 것은 안됩니다.
백두대간도 '인생추억쌓기'의 일환이며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을 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 4천 7백만명중. 과연 몇 명이 죽기 전에 백두대간을 종주해볼까. 1%나 될까. 안될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중에 들어가니 행복하다. 사지가 멀쩡하면 가 볼 여건은 충분한데도 안가보면 자기만 손해지. 바보,천치들. 맛있는 음식을 꼭 입에 넣어 줘야하나. 알아서 먹어야지.
내가 가장 히트로 손꼽는 구호. 몇 년전 기자시절 출입기자전원이 남북교류의 상징인 금강산에 갔다. 북녘 도로옆에 붙은 표어 "가는 길이 험해도 웃으며 가자" 가 너무 인상적이었다. 아마 북한의 고난의 행군시절 선전선동 문구같은데 우리 인생에 어쩌면 그렇게 딱 적용될 수 있는지. 한국 최대의 광고 기획사로 알려진 제일기획사에서도 저런 카피를 만들어낼까 싶다. 내가 본 최고의 걸작이다. 이후 나는 내 인생의 좌표로 삼았다. 주위에 성질부리는 사람있으면 꼭 이 얘기를 해준다. 어차피 죽으면 없어질 몸, 화내지 말고 짜증내지 말고 웃으며 삽시다. 화내고 짜증내면 경상도 말로 "지만 손해지'
또 앞날이 기약 없지만 훌훌 털어버리고 재도약과 재충전을 위해 결단을 내리끝에 지난 8월 미국에 가서 MBA과정을 수학하고 있는 대학동기회장인 이중룡군이 보내온 메일중에서. Life Plan이란 레포트를 제출해야 하는 모양이다. 나의 일년 뒤, 5년 뒤, 20년 뒤의 모습을 SMART기준 (Specific, Measurable, Achievable, Result oriented, Time bounded)에 맞추어 구체적이고 실천이 가능한 목표설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뚜렷이 떠오르지 않는다. 대충대충 살아왔고 대충대충 살다가 죽을 것같다. 물론 몇가지 꿈은 있다.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식으로 살면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 수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실제로 유명한 미국대학의 MBA졸업생들에게 미래에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은 결과 많은 학생중에 3%만이 인생에 대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고 20년이 지난 후 그 학생들을 비교해보니,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학생 3%가 부의 97%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인생의 마스터플랜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인생의 계획을 세워봅시다.
이헌태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당장 10년후에는 뭐가 되어있을라는가. 남이 잘되는 얘기, 백두대간이 뭐 중요하나. 나의 길이 중요하지. 하여튼 30년후에는 정갈하게 늙어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의 길은 잘 되지 싶다. 막연하게. 열심히 살아야지.
백두대간도 민족의 정기, 뿌리, 줄기라며 온갖 화려한 말을 쏟아내고 있지만 솔직히, 간단히 말해 산길이 아니냐. 백두대간을 너무 초라하게 만들었나. 길 속에 진리가 있나니. 말한 김에 좋은 얘기 한마디. 백두대간 길이 훼손되고 있다니 보존에 모두 신경써야하겠습니다. 일단 면피하고. 나중에 심심하면 길이란 주제하나를 갖고 연구하면 어떨까. 하여튼 길 얘기는 무궁무진, 끝이 없다.
유식한 채 한번하고 진짜로 그만 끝내겠습니다. 백두대간 종주하시는 분은 산경표(山經,산줄기)를 아실 것이다. 산의 족보 지리서이다. 다시말해 이땅의 산줄기를 나타낸 지도이다. 백두대간을 위시 1대간, 2정간, 12정맥을 체계화한 사람이 18세기 조선의 지리학자 신경준이다. 지금 태백산맥, 노령산맥등과 같은 산맥체계는 일제시대 일본지질학자들이 지질과 지하자원의 개념에서 만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의 생활과 지형, 지리에 바탕을 둔 전통 산경체계가 사라진 것이다. 민족 전통체계를 복원하자.
신경준이란 분이 철학자 같은 얘기를 했다.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집과 길은 중요함이 같다. 길에는 주인이 없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집과 길에 대해 이렇게 깊은 뜻을 부여하다니. 집에서 출퇴근할때도 의미가 있을라는가. 결론은 백두대간은 자연이고 자연의 것이고 걷는 것은 인간의 행위다는 뜻일 것이다. 길과 걸음, 인간과 백두대간 4자를 이어본다. 백두대간종주의 핵심 철학이 나올 것같다. '백두대간교'를 만들어 교주를 할까. 신도는 몇 명될까. 좀 더 곰곰히 생각해보자.
이처럼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 하면서 모든 만물과 현상에 말도 안되는 의미를 부여하는 버릇이 생겼다. 너무 이렇게 하다가 머리가 도는 것은 아닐까. 시인이나 소설가나 철학자들은 이렇게 살았나 보다. 맨날 그렇게 살면은 머리가 띵하겠다.
나혼자 도로를 보면서 생각했다. "앞에 도로가 있다. 그 길위로 차가 잘 달린다. 옆차선에서는 마주보며 달려오는 차들도 있다. 앞을 향해,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 앞이 시원하게 탁트였다. 목표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귀신씨나락까먹는 얘기. 하여튼 차 헤트라이불빛에 드러난 도로를 보면서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하다니. 역시 나는 짐승이 아냐. 당연. 우리 부모님이 인간인데. 부모님 죄송합니다.
버스는 새벽 3시 30분쯤에 성삼재로 가는 지리산중턱에 세웠다. 일행들은 버스안에서 히터를 튼 채 잠을 청했지만 나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새벽 6시에 기상했다. 버스는 지겹게 고불고불한 길을 지나 성삼재에 도착했다. 구례군 광의면과 남원시 산내면을 잇는 재다. 차에 내려 하늘을 보니 드문 드문 자리한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해발 1080 미터고지의 싸늘한 기운이 우리일행을 맞았지만 너무나 깨끗한 공기여서 숨을 연신 들이 마셨다.
11월 15일부터 12월 15일까지 산불방지차원에서 지리산종주코스를 통제하고 있는 탓인지 등산객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양념하나. 성삼재의 지명이름은 마한왕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얘기다. 2100년전 마한왕이 진한과 변한의 공격에 쫓겨 달궁에 들어왔으며 특히 요지인 남쪽을 지키기 위해 3명의 다른 성을 가진 장수에게 이를 지키도록 했다는 것. 나중에 나올 정령치도 마한왕이 침략을 막기위해 정씨 성을 가진 장군에 성을 쌓고 지키게 했다는 것.
지리산과 마한. 마한이 언제적 시대인가. 우리감으로는 태고적이 아닌가 싶다. 역사적 기술은 상상할 수도 없다. 참 이상하다. 갑자기 당시 마한의 사람들과 만나 얘기하고 싶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먹고 사는지, 그 5백년전에는 석가나 공자가 살아계셨고 당시만해도 인간의 사고는 고도로 발달되었을텐데.
마한사람들은 잊어버린 정말로 먼 조상같은데 지명으로 남아 우리에게 이렇게 가깝게 살아있다니.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침으로 역사가 거의 불타버려 참으로 많은 사연들이 사라졌다. 재미난 민족이어서 재미난 일들도 많았을텐데. 중국은 3천년 전의 역사(국가실재로 확인된 가장 오래된 왕조는 하왕조 다음인 은왕조, 기원전 1700년에서 기원전 1100년)도 남아있는데 우리는 겨우 지금부터 1천 5백년전이후 역사만 남아 있으니. 그것도 조금만. 2천년동안 우리나라를 침략해서 책과 문화재를 불지런 놈들 다 벌받아라.
그런데 성삼재를 출발하려니 큰일이 생겼다. 우리일행은 지리산종주코스만 통제되는줄 알았는데 백두대간 전구간이 통제되고 있었다. 지리산종주코스가 통제되는 줄 알고 장터목산장에서 성삼재까지의 종주구간을 다음으로 미룬 상태였는데 성삼재에서 고리봉까지도 통제되어있을 줄 정말 몰랐다.
서울에서 지리산은 너무 먼 거리.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불법, 탈법에도 불구하고 강행군을 결의했다. 산불방지취지는 충분히 살리기로 하면서. 사실 벌급낼 각오도 했다. 관계자여러분 죄송합니다. 다시는 절대로 안그럴께요.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한번 더 발생하면 제가 앞장서 말리겠습니다. 산을 사랑한 게 죄라면 죄인데. 속죄하는 심정으로 앞으로 산보호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앞장서겠습니다. 후원할 일이 있으면 돈도 내고.
만복대를 거쳐 정령치로 하산했는데 감시요원도 우리들의 솔직 고백에 대해 "성삼재 입구에서 지키는 사람이 없든가요" 라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그나마 다행이었다. 새벽이어서 아무도 없었다. 이날 산행코스가 예정보다 짦아진 것은 정령치에서 고리봉까지는 만약 등산을 시작하면 우리 일행을 보는 시선이 너무 많아 그냥 산행을 계속할 수 없었기때문이다. 이날은 6킬로미터의 길밖에 가지 못했다. 산의 풍경을 모처럼 즐기면서 시간은 대략 5시간 걸렸다.
오전 6시 40분쯤 성삼재를 출발했다, 어둠이 채 가시기전 어둑어둑한 상태였지만 이내 곧 날이 샜다. 철망을 잠깐 우회해서 등산로에 진입했다. 등산기간 내내 감시요원들에게 들켜서 하산당할까봐 노심초사했다. 죄짓고 살지 맙시다.
성삼재-작은 고리봉-묘봉치- 만복대- 정령치로 이어지며 오르락 내리락 연결된 이 능선 코스는 힘든 구간이 없어서 모처럼 편하게 갔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면서. 다리가 "오늘은 웬일이냐 "라며 깜짝 놀랄 정도였다. 내가 힘든 구간이 있을 때마다 동원하는 '속으로 백번세기'도 단 한번도 하지않았다. 지난번 지리산 12시간의 강행군과 이번 5시간의 산행은 비교도 되지않았다. 산보가는 수준이었다.
사실 이번 코스의 경관은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천왕봉을 크게 벗어나 있었기때문이다. 우리는 늘 영웅들의 역사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민초의 역사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버릇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산행을 조금 시작하다보니 이 구간의 경치가 장난이 아니었다. 왜 이 코스가 멋있느냐. 그것은 저 건너편 선명한 윤곽을 그리며 나타나는 지리산의 장엄한 모습을 한눈에 다 볼 수 있기때문이다. 비로소 거대한 능선이 이어진 백두대간의 묘미를 맛볼 수 있었다. 좌우 능선 아래 골이 만들어진데는 운해까지 깔려 있었다. 천왕봉 정상을 정복하고 내려온 지난번 산행과는 또다른 쾌감을 느꼈다. 작은고리봉에서 바로보니 멀리 반야봉과 노고단아래 해발 900미터지점에 하늘아래 첫동네라는 심원마을도 보였다. 옛날에는 저곳에 도인들이 살았나.
능선에서 바라본 주변은 아프카니스탄 산악지역같았다. 온통 거대한 산들로 둘러쌓였다. 차가운 아침 공기를 가르며 이 능선을 타고 걷는 기분을 누가 알까. 유영래선배는 동유럽을 공격해서 초토화시킨 징기즈칸의 부대같다고 했다. 가는 곳마다 무자비하게 학살했던 그 징키즈칸. 타임지인가 동서양을 떠나 역사에 있어 가장 큰 인물이 징기즈칸이라고.
대간을 가면서 뒤돌아서서 오른쪽으로 바라보이는 동네가 구례군 산동면이라고 한다. 이 마을은 사방이 지리산의 높은 능선들에 의해 포근히 감싸져 있었고 마을 입구쪽에만 조금 터였는데 안에는 넓은 논과 밭, 저수지가 있어 참으로 외부의 침입이 어려운 특이한 지형의 마을로 보였다.
만복대에서 바라본 천왕봉, 장터목, 세석산장, 토끼봉, 반야봉, 노고단으로 연결되는 지리산은 너무나 장관이었다. 사방을 둘러보는 전망대 구실을 하는 만복대는 지리산 10승지지의 하나라고 한다. 만복대는 '만복대 1433미터'라는 표지목에 돌무더기가 쌓여있다. 만복을 기원하는 곳이니라. 산에 가는 사람은 마음을 비운 사람인데 무엇을 빌겠는가. 그저 백두대간종주를 무사히 마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나는 만복대를 '마음속의 천왕봉'으로 부르고 싶을 정도였다. 정령치에서도 동남쪽 저편의 지리산의 윤곽이 너무나 선명했지만. 용 등 내지 호랑이 등, 소 등처럼 장쾌하게 쪽 한바뀌 돌아 나온 지리산 역시 우리 민족의 명산다웠다. 사실 만복대나 정령치에서 바라본 천왕봉은 정상의 위용을 떨치지는 못했다. 그냥 주변보다 조금 높게 보일 뿐 눈에 확 들어오지 않았다.오히려 넓다랗게 둥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반야봉이 더 인상적이었다. 반야 즉 지혜, 지리산은 지혜를 얻어가는 산. 따라서 반야봉도 천왕봉 못지않는 의미를 부여해야할 것같다. 천왕봉만이 지리산의 전부가 아니라 모든 봉우리와 능선이 지리산이라는 것을 체험했다. 중국에 이런 말이 있다 "가마 타는 사람은 가마를 끄는 사람의 고통을 알아야한다". 대장만 중요한게 아니라 대장을 있게 하는 똘마니들도 중요하다. 영웅중심의 사관, 민초중심의 사관, 둘다 중요하다. 그동안 두 사관이 피튀기게 싸웠는데 이제 화해하고. 어쨌든 의미가 연결되나. 나도 모르겠다.
정상도 멋있지만 능선도 멋있다는 것을 이번 산행을 통해 알았다. 만복대로 향하는 길은 영남알프스의 사자평같기도 하다는 사람도 있었고 또 소백산 비로봉정상을 향해가는 것같다는 사람도 있었다. 억새풀군락을 지나며 줄지어 행군하는 그 모습, 예술이었다. 날씨도 너무나 좋았다. 어떤 곳은 봄, 어떤 곳은 여름날씨마저 보였다. 땅은 얼기 직전에 굳어가고 있는 상태여서 밝으면 흙이 으스러졌다. 굳이 말한다면 이번 산행은 혹독한 겨울산행이란 예상을 빗나가고 포근한 가을산행이었다.
압권은 역시 헬기장이 있는 묘봉치에서의 일출장면. 오전 7시 27분 노고단과 반야봉사이에서 동쪽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면서 장엄하게 떴다. 너무나 장관이었고 탄성을 내질렀다. 너무 눈이 부셔 지켜볼 수가 없었다. 장님이 될 각오가 없어서 눈을 감았다 떴다를 몇번이나 되풀이했다. 지난번 산행때 지리산 10경중의 하나인 천왕봉 일출을 못본데 대한 보상이라고나 할까.
벌겋다는 말만 나오면 떠오르는 분이 있다. "서산을 벌겋게 물들이면서 떠나고 싶다"던 김종필 자민련총재가 요즘은 "조용히 떠나는 것도 멋있을 듯"이라고 말했다는데. 그분은 어떻게 그렇게 멋있는 말들을 알고 계시는지. 존경스럽다. 어쨌든 동쪽하늘이든 서쪽하늘이든 해가 벌겋게 뜨고 지는 것은 역시 좋다. 일출과 노을. 여기서 얼마나 많은 시가 나왔나. 이 장면이 없다면 시인들은 무엇으로 시를 쓰나. 무엇으로 먹고사나.
그런데 서쪽 저편에는 호빵 같은 달이 뭔가 여운이 남았는지 병자처럼 자그마하게 흰색의 색깔을 띠며 힘없이 걸려있었다. 처량해보였다. 태양이 떴으면 달이 사라져야지. 자기 시대가 아니면 빨리빨리 사라져주어야 한다. 인간사에도 욕심과 고집 때문에 평생 잘나가든 사람들이 말년에 인생 망가진 경우가 한둘이가 아니다. 물러날 시점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 달아, 눈치껏 행동해야지. 눈치없기는.
오늘은 뜨는 태양과 지는 달을 동시에 봤다. 역시 태양이 멋있었다. 태양계로 보면 태양과 달은 비교도 되지않는다. 지구가 태양주위를 돌고 달이 지구를 도니까. 태양이 전국의 중심이라면 달은 지방의 하부조직에 해당된다.
하지만 인류가 달나라에 가기 전 우리 조상들은 '낮에는 해, 밤에는 달' 이런 식으로 균형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오히려 달이 우리 민족의 정서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달의 영향력이 극대화될 때. 실화한토막. 1969년 미국인 닐 암스토롱이 달에 착륙했다는 보도를 전해들은 한 노인분 왈. "방송국도 미쳤구먼. 어떻게 사람이 달나라에 가. 그럼 계수나무밑에서 토끼는 잘 살고 있데" 인류의 달착륙이 인류의 꿈을 실현시켰는지 인류의 꿈을 깨부수었는지. 여론조사해봅시다.
하여튼 달은 해에는 가까이하기도 어려운 군번. 따라서 밤이 되어 달이 뜨니 해가 지는 게 아니라 해가 지니 밤이 되는 것이고 아침에 해가 뜨니 달이 사라지는 것이 맞다. '해중심의 가치관'이라고나 할까. 앞으로 음양의 조화라는 미명아래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대들지 말도록. 농담. 나의 여성관은 여성들이 더 큰소리 치고 대신 더 큰 책임을 느끼도록. 얌체처럼 이문만 챙기고 그에 걸맞는 역할은 하지 않으면 안되지.
이날 산행의 대미는 역시 칠선계곡에서의 나체목욕이다. 정령치에서 버스를 타고 남원시 인월면으로 내려와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배를 채웠다. 언제 먹어도 언제 마셔도 촌음식은 맛있다. 운봉에서 일원가는 도중에 서편제마을도 있었다. 명산에서 역시 명창이 나오는 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이어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로 옮겨 칠선계곡에 들어갔다. 20여분 걸어 올랐다. 입구에서부터 입이 쩍 벌어졌다. 그 비경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탄성이 나왔다. 일곱명의 선녀들이 놀만한 경치였다. 계곡을 포함 주변산의 정경이 한폭의 동양화였다. 천왕봉에서 바로 직하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하고 긴 계곡중의 하나란다. 기암괴석, 용소, 폭포. 콸콸 물소리. 신선이 된 것같았다. 여기서 살고 싶었다. 칠선계곡 통행을 막았는지 인적이 없었다.
이성부시인은 '지리산'제목의 시집중에서 '칠선골'이란 시를 통해 "----성깔이 많은 골짜기다. 그만큼 칼칼한 정신들 우글거려---우리 삶의 고단한 한나절 또는 한평생 깊게 가르치는 길. 점필재(연산군때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당한 조선초 학자 김종직의 호)에서 정순덕(지리산 최후의 여자빨치산)이까지 또 누구 누구 이 길로 오르내렸음을 떠올리면서 나도 산과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고마워하는 법을 배웠다.---"라고 적었다. 깊고 험한 계곡에서 큰 깨우침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조금 올라가 큰 소에 모두가 빨가벗고 몸을 던졌다. 너무나 손발이 시렸고 몸이 덜덜 떨려 금방 올라왔지만 3번이나 잠수를 되풀이 했다. 물밖을 나오니 사우나에서 땀을 빼고 온 것처럼 몸이 날아갈 듯이 가뿐했다. 겨울철 냉수욕이 건강에 좋은 이유를 알 것같았다. 이날 하루 쌓인 피로, 아니 속세에 묻어있는 때들을 말끔히 씻는 행사 같았다. 집단나체쇼. 사진에 잘 잡혔을 것이다. 주요부위를 가리고 우리 사이트에 올리겠지. 산에 가서 계곡에서 목욕하는 재미 이것이 내겐 산행의 또다른 즐거움이다.
추성마을은 그 유명한 변강쇠와 옹녀가 살림을 차린 마을이라고 한다. 지리산 정기를 받았으니 정력이 왕성할 수밖에. 현대에 올수록 진가를 발휘하고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변강쇠와 옹녀, 지금 그들이 이 시대에 복귀한다면 최고의 영웅이 될 것이 뻔하다. 매일 텔레비전초대석에 나올 것이다. 아마 그 당시에는 숨어 살았을걸. 짜식들 , 좋은 시절에 태어나야지. 과거 이조시대때 천민계급인 남사당패가 지금 국보급 인간문화재로 대접받고 있잖아. 또 간혹 기생처럼 불려다니고도 했던, 역시 신분이 낮았던 여의(女 醫)가 지금은 여성 최고인기직업이며 평생 편안하게 먹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조선시대사람들이 미쳤지. 특히 국악인들은 내가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그때 괄시를 받았다니. 그리고 병을 고치는 의사들은 요즘 돈벌려고 해서 밉지만 병을 고쳐주니 고맙기는 말로 다표현 못하지.
추성마을은 고즈녁한 옛 고향 마을의 모습과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마을이었다. 마을을 통과하면서 어떤 집앞 대문옆에 감이 많이 쌓여있어 몰래 한 개 슬쩍해서 먹어보았다. 맛이 없었다. 나중 버스주차창에서 만난 아주머니에게 "왜 맛이 없냐"고 묻자 "졸감은 맛이 없어. 산에 그대로 매달려있잖아요. 아까 그집앞에 있는 감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감을 땄다가 맛이 없어 버린거야. 그집 주인이 등산객들이 자기집앞에 감을 자꾸 버리고 간다"는 것이었다. 아이쿠 그런 사정이 있었구먼. 그렇게 맛도 없는 감을 처음 먹었다. 그러나 동네와 산의 감나무에 감이 주렁주렁달려있으니까 사진감으로는 안성맞춤이다. 까치나 새들이 와서 먹는다는구먼. 배터지게 많이 먹어라.
오후 4시반 추송리를 출발해서 상경했다. 주말을 맞아 중부고속도로 길이 엄청 막혀 길동 청산학원앞에 겨우 10시반쯤 도착했다. 서둘러 전철을 타고 광화문에 내려 전날 저녁에 세워둔 내차를 타고 자정쯤 화정집에 도착했다.
아파트 문을 열자마자 중1 아들이 달려오며 "아빠 어제, 오늘 나 공부많이 했다"고 자랑이고 마누라는 "잘 갔다오셨어요"라며 반긴다. 딸은 "아빠 몇시에 와"라고 추근대다가 꿈나라로 갔다고 한다. 해준 것도 없는데 "아이 나는 행복해"라는 딸. 모두들 고맙다. 나도 행복하다. 집에 와도 좋고 산에 가도 좋고.
마르쿠제는 "모든 사람의 인생론은 결국 행복론"이라고 명쾌하게 말했다. 인생이 별거냐. 행복해지기 위한 것 아니겠어요. 서양 철학의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고 했어요. 고대 서양철학자들은 행복은 도달 가능한 것으로 보았고 이를 위해 자기수행과 연마,욕망과 쾌락의 통제를 방법으로 삼았죠. 똘똘한 인간들은 동서양이 비슷하구만.
자식들이 귀담아 들어야 핵심포인트. 내가 산에 가는 것도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 너희들 먹여살릴려고 그러는 거야. 말이 된다.
플루타크 영웅전에 따르면 아테네의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는 "저는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지만 저를 다스리고 있는 사람은 저의 아내고 저의 아내를 다스리고 있는 사람은 저희들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네요.예나 지금이나 자식이 '상전'이구만. 내 어릴 때는 아버지가 '상전'이었는데 이헌태, 우째 신세가 그렇게 되었노. 돌려도. (11월 23일,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