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6.28일 토요일, 백두대간 완주를 향한 열두번째 걸음에 나섰다. 잇달아 기념등반인가. 5월 18일 광주민주화항쟁기념. 6월 6일 현충일기념, 이번에는 6월 29일 민주화선언기념. 백두대간도 즐겁게 산행하고 또 조국과 민주화를 위해 몸바치신 분들의 넋도 기리고. 장하다, '백두대간 한걸음 이어가기' 팀 여러분. 이것을 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 '이어가기' 팀과 조국이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산과 하나가 되었다",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2002년 월드컵때는 국민이 모두 하나가 되었는데. 하나되는데 아주 재미 붙였구만.
무조건 하나가 된다고 좋은 게 아니죠. 특히 남,녀관계에 있어서는 극조심. 한 몸으로 섞다가 인생조지고 패가망신한 사람이 많더라구요. 가끔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어하는 연인들 있잖아요. 결혼 프로포즈가운데 가장 상투적, 가장 느끼한 것 하나 소개,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 눈 뜰 때 바로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는데". 요새 이런 프로포즈의 성공률은 낮을 것 같은데. 닭살 돋아. 아예 하루종일 같이 살아라. 슈퍼마켓이나 식당을 함께 하면 지겹도록 봐서 얼굴을 외울텐데.
눈을 감고 부모나 배우자, 자식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의외로 자세히 잘 안떠올라요. 그렇게 매일 얼굴을 대하고 사는데도. 이 기회에 자기와 피부 맞대로 같이 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한번 보세요. 코는 어떻게 생겼는지 입은 어떻게 생겼는지 인중은 어떻게 생겼는지. 아주 외울정도로.
화장실도 따로 가야하고 아예 붙어살 수 없을까. 암수 한 몸 동물이 얼마나 부럽겠어요. 지렁이와 굴은 남성과 여성이 한 몸이라고 하네요. 기원해서 그렇게 되든지. "우리 둘이 다음세상에는 지렁이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엽기. 혹시 왜 이 말이 나온 줄 아세요. 끈으로 묶다시피 함께 다니는 커플을 '한 쌍의 바퀴벌레'. 죄송합니다.
인터넷 게임과 영화보급이 대중화되면서 '가상'과 '현실'을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걱정이죠. 하기야 하루종일 가상속에 살면 대통령이나 대기업회장도 부럽지 않겠구만. 꿈속에서 기쁘고 아름다운 일로 기분이 좋으면 현실에서도 기분이 좋은 게 사실이다. 잠을 깨면 한낱 꿈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꿈도 엄연히 시간을 소비하는 또다른 현실이며 기쁨이 되고 추억이 될 수 있다.
꿈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며 가난한 사람이 즐겁게 살 수 있는 요술방망이가 될 수도 있다. '꿈꾸는 자가 창조한다'가 아니라 '꿈꾸는 자가 행복하다' 로 전환해야겠구만. 문제는 악몽만 자주 꾸는 것. 벤쳐상품 아이디어 하나 제공. 좋은 꿈을 꾸도록 유도하는 장치를 개발하면 완전 대박이네. 일명, "좋은 꿈 제조기". 국가전략산업으로 키워야겠다. 만약 현실화되면 한국은 팔자가 달라진다.
꿈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인물이 장자죠. "사람인 내가 나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나비인 내가 사람의 꿈을 꾸는 것인가" '장주지몽' 또는 '호접지몽'. 장자의 제물편에 나와있죠.
"이전에 장주(장자)는 꿈에서 자신이 나비로 되었었다. 펄펄 날아다니는 한마리의 나비는 아무곳에나 자유로이 날아다니면서 자신이 본래 장주라는 것을 근본적으로 몰랐었다. 갑자기 깨어나자 자신은 분명히 장주였다. 그는 자신이 꿈에서 나비로 되었는지 아니면 나비가 꿈속에서 장주로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장주와 나비는 필경 구별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물화(物 化)"라고 부른다"
"인생은 꿈과 같다"는 말이 있죠. 장자는 장주와 나비간의 변화를 '물화'(만물의 변화),변화의 한 양상으로 보았다. 현실도 꿈이고 꿈도 현실이다. 인생을 예술적 환상으로 만들었죠. 절대도 없고 차별도 없는 세계가 바로 장자가 추구한 '유토피아'세계가 아닌가 싶다. 결론은 자유롭게 살면서 현실을 즐기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맞고요. 이런 상황이 현실과 꿈이 뒤섞이며 히로뽕 맞은 환각상태인가요. 히로뽕 환자들은 그럼 장자의 철학을 실천하는 사람들인가. 도가의 후예들. 아닙니다, 아니고요. 장자는 현재의 행복과 자유로운 삶을 누릴 것을 권유하신 것 같습니다.
장자도 이미 수천년 후에 다가올 인터넷시대의 가상공간을 예측했구만. 결국 인류의 태고적 신화의 시대로 컴백하는가. 인간이 역사적 진보를 거듭한다고 까불어도 허무하게도 과거로 돌아가는구나. 아닙니다, 아니고요. 죄송합니다. 이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분단국인 한반도는 언제 하나가 되려나. 되어도 골치 아프다고 하네요.
나는 백두대간의 장쾌한 능선을 타고 내리면서 산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산 없이는 못산다. 산이 나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고 있다. 건강을 주고 있다. 삶의 지혜를 주고 있다. 육체적 ,정신적인 면 모두를 충족시켜주고 있다. 한 면도 아니고 두 면 모두에 도움을 주는 것은 이세상에 없다. 나에게는 적어도 산은 삶이고 삶은 산이다. 성철 스님이 말씀하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 아니다. 성철스님은 너무 단순한 분이셔. 그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인가요. 성철 스님은 남들 다 아는 얘기해도 유명하시네.그만큼 도가 깊은 분이라는 뜻이겠지요. 삶과 산이 '사'자가 들어간게 비슷하구만. 진정한 삶은 산에서 찾아야겠구만.
여러분 흔히 "산다는 게 뭔지" 스스로 자문자답하잖아요. 진짜로 산다는 게 뭔 줄 아세요. 5천여년 동안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성인과 현자들이 나타나 이 주제를 놓고 일생을 두고 연구했지만 딴 짓하고 돌아다녔지요. '산(山) 다(多)'. 산에 많이 다니는 게 산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아예 산속에 눌러앉아 살며는 그것이 바로 인생의 완성이죠. 말 되나 모르겠네. 안되면 그만이고.
2.
28일 저녁 11시를 못 미쳐 약속장소인 길동 청산학원앞에 도착했다. 고양시 화정집을 나서 전철을 타고 대략 1시간 40분가량 걸린 듯했다. 아휴, 멀기도 하다. 기차타면 서울서 대전까지 거리다. 서울이 넓기도 하구만.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사니. 지방에서 공부 쬐금 잘 했다고 하면 서울로 와서 그대로 눌러앉으니.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
도착해서 학원앞 뼈다귀 감자탕 가게에서 쐬주 한잔 알딸딸하게 걸쳤다. 돼지척추의 한부분인 감자뼈를 넣는다고해서 감자탕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하네요. 감자뼈를 푹 꽌 국물에 감자를 넣으니 100% 진짜 '감자탕'이네. 이것을 두고 '찌지고 볶고, 너거들끼리 다해먹어라'라고 하죠. 마침내 저녁 11시 40분 버스가 출발했다. 참석인원은 총 17명.
어두운 적막을 뚫고 새벽 4시 17분 지난번 산행때 하산했던 덕유산 끝자락에 있는 삼봉산아래의 고즈녁한 소사마을에 내렸다. 전날까지 장마비가 온 탓에 마을과 도로가 이슬을 머금은 채 희뿌연 안개 속에 파묻혀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가시거리가 5미터도 되지 않았다. 감추어진 세상을 향한 미지의 호기심과 묘한 신비로움이 내 마음에 가득찼다.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수도승, 일행은 잠시 헤매다가 도로로 인해 끊긴 대간 길을 발견하고 발길을 내딛었다. 산행을 시작한 지 30여분이 지나자 벌써 날이 훤하게 밝아졌다. 새벽 5시도 되기 전에 만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성질도 급하지.
날씨도 너무 좋고 기분도 너무 좋다. 작년 가을 백두대간 산행을 시작한 이후 처음 맞이하는 장마철. 한편에서는 반갑기도 했지만 또 한편에서는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완전 기우에 그쳤다. 비갠 후라서 공기는 더할 수 없이 청정, 청량, 상쾌했고 대지는 재빠르게 빗물을 빨아들여 등산화도 젖지 않았다. 등산하기에는 최상의 조건, 100점이다. 너무 너무 원더풀이다.
현지에 내려올 때까지 도저히 상상도 못했다. 지난 주 내내 장마철이니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해야한다고 서로 다짐했건만. 싱겁기는. 우리 일행이 12번의 대간 산행기간동안 날씨가 늘 좋아서 '축복속의 대간산행'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축복'은 좋은 말인데 축구처럼 복을 차는 것도 '축복'이네. 말속에 완전 다른 뜻이 둘다 들어있네.
이럴 때 이헌태의 조언 한마디. 한자는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한자를 배운다고 이헌태가 한글을 버리나, 나 원 참. 생각이나 사고가 더 풍부해지지. 중국 사람들도 놀란다면서요. 한자문화권가운데 2,3천년전 자기 조상들이 사용하는 한자를 한국사람들만 유일하게 조금도 고치지않고 그대로 사용하니. 얼마나 기특하겠어요. 공자나 맹자가 다시 태어나면 멋대로 줄여서 쓰는 중국이나 일본의 한자를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열받지. 한국사람들이 후손인줄 알겠죠.
질문. 한국사람들은 왜 남의 나라 글을 그대로 사용하나요. 고집불통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게을러서 고치기 싫어서 그런가. 원래 한국사람들이 '골통기질'이 좀 있어요. 이조때도 그랬지만 실리싸움에는 약하고 명분싸움에는 가문과 목숨을 걸잖아요. '공자말씀'이 아니, 우리 세대들에게는 '공자 왈'이 익숙하지만. 예수님 왈, 부처님 왈은 안 어울리죠. 이처럼 공자왈이 가장 잘 통하는 나라가 한국이라면서요. 좋은 점인가, 나쁜 점인가.
3.
소사마을은 해발 700-800미터에 놓여있어 주변 산 곳곳을 일구어 고냉지 채소를 키우고 있었다. 강원도를 제외하고 고냉지채소 농사를 하는 곳은 이곳 뿐이라고 한다. 고냉지채소농사가 돈도 되지않는다고 하네요. 고냉지채소 농사라도 해서 우짜든지 잘 살아보려고 하다가 산은 온통 다 파헤쳐놓았네.
고갯마루에서 출발해서 언덕길을 따라 큼직 큼직한 고냉지 채소밭의 둑과 농로를 몇 개 지나자 본격 오르막길로 들어섰다. 비쩍마른채 키만 훌쩍 큰 낙엽송들이 빽빽하게 군락을 지으며 집단적으로 사열했다. 하얀 개망초꽃도 함초롬하게 인사를 건넸다. 잠에서 갓 깬 새들도 눈을 비비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소리를 듣고 '짹짹'하며 반갑게 환영했다.
여름철이라서 나무와 풀들이 우거진데다 많은 사람이 다니는 일반 등산길이 아닌 탓에 대간길은 정글의 밀림을 방불케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길만 나있을 뿐, 잡목으로 뒤덮여 있어 몸과 머리를 들이밀며 헤쳐나가야 할 곳이 수두룩했다. 지난 산행때 반바지 차림으로 가다보니 무릎아래 다리가 할퀴어져서 이번 산행에는 긴바지를 입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적막강산' 속에 혼자서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홀로병'에 걸리신 분이든가.
새벽 5시 4분 드디어 주변이 훤히 보이는 언덕에 올랐다. 뒤돌아 보면 늠름한 근육질의 덕유산을 북쪽 끝에서 받치며 짙은 초록 비단옷을 입은 삼봉산, 천의무봉의 하늘, 소사마을을 실개천처럼 뭉개지으며 마구 흘러가는 운무. 천지가 티끌이나 먼지 하나 없이 너무 깨끗하고 선명했다. 혼탁이 전혀 생기지도 않은 천지창조 첫 날의 순수, 청정 그 자체였다.
새벽 5시 15분부터는 오르막이 본격 시작되었다. 땀이 비오듯 쏟아져 짧은 티셔츠차림으로 바꿨다. 나무와 풀들이 물기를 머금은 탓인지 산은 지난 산행때의 연초록보다 더 짙은 진초록의 페인트로 채색되어있었다. 낙엽송과 굴참나무도 빼곡히 들어차 있고 주홍색 붉은 왕관을 자랑하는 참나리꽃, 펑크 헤어스타일의 엉겅퀴가 한껏 멋을 내고 있었다. 봄, 산하를 붉게 물들였던 진달래와 철쭉은 자취를 감취버렸다. 내년에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겠지. '그 계절에 그 꽃'. '그 나물에 그 밥'하고는 다른가. 다르지.
이런 말이 생각나네. 해마다 계절 따라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사람들과 인심은 같지 않고 변하네. 이헌태는 순환하는 계절꽃을 보면서 변화무쌍한 인간사를 떠올리네. 언제쯤 인간이 모두 화평하게 살 것인지. 꿈깨라구요. 알겠습니다.
4.
'쏴 쏴'하며 '숲속바람'도 신이 나 흥겹게 춤을 춘다. 나뭇잎과 풀들이 살랑살랑 장단을 맞춘다. 바람도 살아있고 나무와 풀도 살아있다. 온갖 생명이 가득하다. 선선하게 부는 '숲속 바람'이 이렇게 좋을 수가. 심신의 피곤을 날려 버릴 것 같은 통이 큰 '정상바람' 이나 그 동생 뻘 되는 '능선바람', 계곡을 따라 산 아래에서 산 위로 치고 올라오는 냉기서린 '계곡바람'하고 또 다르다.
'숲속바람'은 숲속의 나무들이 일제히 부채를 들고 부쳐주는 것 같은 '정겨운' 바람이다. 연신 땀을 흘리면서 제 때 필요할 때 불어주는 '고마운' 바람이다. '숲속바람'은 흥건한 땀을 훔쳐갔고 도시에서 찌든 스트레스를 훔쳐갔다. 땀과 스트레스를 훔쳐가는 도둑은 좋은 도둑이다. '풍도(風 盜)'라고. '풍도'(882-954)아시죠. 예전에 한번 소개했는데. 중국 5대10국 시대에 다섯 왕조를 거치면서 20여년간 재상을 지냈사람이죠. 정권을 도둑질했구만. 처세로서는 입신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네요.
저는 '풍도' 보다는 '풍환'이 마음에 더 들어요. 형제간은 절대로 아니고요. 전국시대 제나라의 재상 맹산군이 천하의 선비 3천여명을 식객으로 받아들였는데 남루한 '풍환'이 나타났나고 하네요. '풍환'이 3등 숙사에 머무르게 하자 칼을 치면서 "장검아 돌아가지 않으련, 이곳 식사때는 고기도 없다"고 노래해서 맹상군이 황당했지만 요구를 들어주니, 또 닷새후 "장검아 돌아가지 않으련, 밖에 나가려해도 마차가 없다"고 노래해서 요구를 들어주었죠. 또 닷새후 "장검아 돌아가지 않으련, 처자도 없고 집도 없다"고 노래해서 이번에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고 하네요. 이 고사성어가 바로 '장검아 돌아가지 않으련' 이란 뜻의 장협귀래호(長 鋏 歸 來 乎). 풍환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죠. 어찌보면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입니다. 거의 '또라이' 수준이죠.
'풍환'은 이후 맹상군의 식솔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식량을 내어주는 도량도 지녔고 맹상군이 재상의 자리를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 3천명이나 되는 그 많은 식솔이 모두 떠났지만 그만이 홀로 그 옆을 지키는 의리도 가졌다고 하네요. 맹상군도 멋있는 사람이지만 '풍환'은 더 멋있죠. 요즘 전재산을 쏟아 부으며 인재를 모으고 이를 즐기는 맹상군 같은 배포 큰 사람도 없고 기개,도량,의리를 모두 갖춘 '풍환' 같은 사람도 없죠. 모두들 지 새끼, 지 가족, 지 혼자 잘 사는 것에만 매달리니. 요즘 세상 인간들은 경상도 말로 '쫌생이' 같은 놈들. 나도 포함되나. 그렇다고 봐야지. 깨갱.
각설하고. 도둑은 다 나쁜 도둑이지 좋은 도둑이 어디 있냐. 장길산과 홍길동 같은 의적은. 쬐금 좋은 도둑이라고 봐야지. 그래도 도둑은 도둑이지. 모르겠다. 내가 왜 그런 판단을 내려야하는데. 의적을 다룬 만화책이나 소설책이나 영화나 보면 되지. 그냥 살면 되지.
이전정권의 권력주변을 떠돌던 김영완씨의 자택을 털어 100억원 가량을 훔친 도둑들이 조사 도중에 조사경찰관과 술을 마시고 또 피해자가 도둑의 선처를 호소했다는 몇해 전의 해괴망칙한 사건이 근래 대북송금특검 와중에서 밝혔졌죠. 아주 개판이구만. 생활정보하나. 도둑들이 절대로 못 훔치는 것. 머리 속에 든 것은 누구도 훔쳐갈 수 없는 재산. 부모들이 부지런히 자식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도, 또 책을 읽으면서 자신만의 행복을 쌓아가는 것도 다 이 때문이 아닐까요. 이헌태 모처럼 옳은 소리했네. 고맙습니다.
죄얘기가 나왔으니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마하트마 (위대한 영혼) 간디는 "죄의 크고 작음이 어디 있는가. 죄는 죄이지 달리 생각하는 것은 자기 속임이다"고 말씀하셨네요. 와, 빡시게 사시네. 서양 최초의 직업철학자로서 철학교수를 지냈던 칸트는 '순수형식주의 윤리학'을 통해 윤리학이 현실상황과 타협하는 것을 막기위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셨네요. 와, 독하게 사시네. 쉽게 얘기해서 '하얀 거짓말'도 용서 못 하겠다는 뜻. 공자 왈 흉내내어 헌태 왈, "나는 그리 못산다" 헌태 왈은 안 어울린다. 관두세요. 제멋에 살아요. 니 인생이나 잘 살어. 왈왈하니, 개들이 하는 말이 왈아닌가. 공자님 죄송합니다.
공자가 하늘의 축복이 아니라 부모님의 야합(野 合) 속에서 태어난데다 편모슬하에서 자라서 하늘과 인륜에 대한 '충성론'을 폈듯이 칸트도 저렇게 말한 독한 사정이 있더라구요. 160센티도 안되는 단신에 허약하고 가슴도 기형적이었다고 하네요. 신체 콤플렉스가 심했다고 봐야죠. 평생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산책시간이 시계처럼 정확한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잖아요. 헌태 왈, "나는 그리 못산다" 그래도 칸트가 임종할 때 남긴 말이 뭔 줄 아세요."좋다". 제가 백두대간 산행가서 촌 김치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 걸치면서 하는 말하고 똑같죠. "캬, 좋다"
상식추가.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철학의 핵심문제를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요약했고 정답은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 인간이성과 관련해서 탐구해야 할 문제를 세개로 나누었죠. 1. 나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나 2.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그런데 칸트 양반, 그런거 백날 연구해 봐야 뭐하나. 산에 열심히 다니면 너무 너무 행복하고 인생이 짱인데. 아시겠어요. 그 시간에 산에나 많이 다니세요. 인생을 즐길 생각은 안하고 즐기는 방법만 연구하고 있네. 답답하기는. 국민여러분, 제 얘기가 맞죠. 이헌태가 인생을 잘 사는 거예요, 칸트가 잘 사는 거예요. 세계적 대 철학자인 칸트하고 일개 범인인 이헌태하고 비교하느냐구요. 왜 이래요, 저도 대구 집에 가면 우리 엄마한테는 하늘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존재라구요.
'휴버트 허'라는 대학원 선배가 있는데요. 동문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더라구요. "약간의 비행이나 악행은 괜찮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번지고 있는 것같습니다. 정치계에서는 떡값이라는 명목으로 수억원을 주고 받고도 잘못이 없다고 주장을 합니다. 한 두 번 바람 피운 것도 남녀를 가릴 것 없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혼전, 혼외 정사도 아무런 죄책감이 수반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임신과 같다. 임신을 하고 약간만 임신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약간의 잘못도 신중하게 여기는 인식을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와, 그 선배도 완벽을 추구하시네.
남이 보지않고 혼자 있을 때도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신독(愼 獨)'이란 말이 생각나네요. '삼지(三 知)' 아시죠.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아는데". 사실은 '사지(四 知)'인데.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니가 알고". 이헌태하고 '신독사상'은 거리가 한참 멀구만.
쓸데없는 얘기. 듣거나 말거나. 숲속바람, 능선바람, 정상바람, 계곡바람. 바람도 많은데 치맛바람은 뭐며. 바람기 있는 남,녀와 바람난 남,녀는 뭐요. 산바람처럼 시원하고 좋은 것인가. 바람난 남,녀는 산에 가서 산바람 많이 맞은 사람인가. 아닙니다, 아니고요. 바람은 형체도 없는 것이 색깔과 냄새도 없는 것이, 기약도 없이 정처 없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방랑객처럼 떠 다니는 자유인입니다요. 그래서 '바람기, 바람난'이란 표현이 나왔나. 바람 피우더라도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는구나. 바람의 속성상. 이헌태 니, 우얄라카노. 그냥 한번 해본 소리입니다. 마누라한테 맞아 죽을라.
5.
산행을 계속하다 보니 불청객 모기도 있네. 모기, 파리도 생명인데, 제가 아직 생명사랑이 덜 되었는지, 또 수양이 덜 되었는지, 그 놈들까지 생명으로 인정해서 아끼기에는 웬지 꺼림직해서. 스님들도 모기, 파리를 좋아하시는 지. 나쁜 병을 옮겨서.
사촌지간인 신라 왕관의 깃 모양을 한 고사리와 고비가 훌쩍 자라 대간길 옆을 지키고 있었다. 고비가 더 귀한 나물이라고 하네요. 취나물도 쑥쑥 커 어른이 되어 먹을 수가 없다고 하네요. 숲속은 나무와 풀들이 뿜어대는 풋풋한 천연향기로 가득 찼고 나의 코를 통해 온몸을 전율로 휘감았다. 간만에 공짜 풀 냄새를 흠뻑 맡느라 코를 끙끙댔다.
새벽 6시 산중턱에 올라서니 아침의 힘차고 젊은 햇살이 안개를 내몰아내면서 소사마을의 운해는 거의 걷혔다. 30가구 내지 40가구가 옹기종기 흩어져 삶을 이루고 있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건너편 오르락 내리락 하며 물결치는 삼봉산을 위시한 덕유산의 능선자락이 지칠줄 모르는 기운을 억누른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그 위에 펼쳐진 하늘에는 회색빛 먹구름이 간간이 뒤섞여 있었다.
거창도사인 백신종 선배가 뒤늦게 달려와 조우했다. "와, 반갑습네다". 힘을 내 10여분 더 올라가니 산행이후 처음으로 큰 봉우리에 다다랐다. 동,서, 남쪽 세 방면이 오롯이 보였다.황홀경, 비경, 장관이었다. 운해였다. 꼬깔 모양의 산 봉우리들이 다도해의 섬들처럼 남겨졌다.
용광로의 펄펄 끓는 김처럼 뭉게뭉게 떠다니는 운해는 비온 뒤 '기압과 대기의 작품'이 아니라 천지의 신성한 기운이 모두 모여 합쳐진 것이리라. 신선 주변에 신성한 기운이 서리듯이. 저 운해 위를 도인처럼 한번 거닐어 보았으면. 이름하여 '천상 다도해' 내지 '하늘 다도해'를 보면서, 이헌태는 '산은 침묵이고 바다는 역동'이란 개념을 떠올렸다.
올해초 덕유산 주능선 산행 때도 일년에 한번 볼까 말까한 너무도 환상적인 운해를 목격해서 다들 탄성을 내지른 적이 있었다. 드넓은 중국 대륙에서 운해로 이름을 떨치는 '황산의 운해' 를 본 나로서는 그때 그 못지않은 운해에 대해 감개가 무량했었다.
이번 산행때도 한반도 남녁의 기라성 같은 웅장한 산들의 봉우리만 남겨놓은 운해가 기가 막혔다. 백두대간 산행이 종결되면 덕유산은 운해로서 내 가슴속에 영원히 남지 않겠나 싶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운해가 있다니, 나는 너무 축복스런 나라에 태어났구나. 내가 전생에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착한 일을 했나. 한국에 태어난 사람은 아프리카 수단에 태어난 사람보다는 전생에 훨씬 더 좋은 일을 했다고 봐야죠.
6.
그런데 이 시간에 서울에서 잠자고 있는 절대다수의 한심한 인간들. 천국을 옆에 두고 맨날 천국이 어쩌고. KBS '개그콘서트'의 세바스찬의 말을 인용, '한심해, 한심해, 한심해'. 한 마디 더. "(한국에서) 나가 있어". 빚내고 돈 들여 미국 그랜드캐넌, 남태평양 사모아섬에 왜 가나. 한국의 아름다운 비경을 다 구경하고 나서 볼 것이 더 이상 없으면 외국에 가지. 한국에 가볼 만한 곳도 안 가면서 외국에 나가는 것은 환장을 해가지고. 이를 두고 '사대주의'라고 하죠. '국토사대주의'내지는 '관광사대주의'. 말 되나 모르겠다. '사대외교주의'나 '문화사대주의'는 들어보았어도 '국토사대주의', '관광사대주의'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보았다구요. 제가 원래 말 잘 만들잖아요
저도 외국 10여개국에 나가 본 사람인데 초반 나들이 때는 세계에 아름다운 나라들이 너무 많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한국이 금수강산'이란 말이 '애국심 강요용' 뻥인 줄 알았는데 설악산 대청봉에 봄,여름,가을, 겨울 계절마다 올라가 능선마다 골짜기마다 다녀 보니 진짜 그 말이 맞더라구요. 참고 '뻥' 고상한 말로 '풍'. 전 세계 뻥 가운데 가장 유명한 뻥이 중국뻥이죠. 장자라는 성인까지 뻥쳤으니까 일반 사람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장자의 '소요유편'에 보면 곤이라는 고기는 크기가 몇천리, 붕이란 새의 등판이 몇 천리가 되고, 한번 날면 6개월만에 쉰다고 하네요. 기가 막혀서. 만리장성이나 진시황의 병마총을 보면 대국 답지만 뻥도 과연 대국 답구만. 그 대국이 손바닥만한 한국한테 작살이 났잖아요.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 때문에 망했잖아요. 인류의 최대 적인 무엇인줄 아세요. 핵도 아니에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 '바이러스'.웃기네. '사스'때 보니까 대책도 없더라구요.
국민여러분, 한국은 정말 '금수강산' 입니다. 믿어 보세요. 속고만 살았나. 매일 숨붙이고 사는 한국보다는 그래도 뭔가 흥미로운 외국으로 관광 가고 싶다구요. 알아서 사세요. 다만 저 따라하세요. "내실, 내실, 내실", 목소리 더 크게 "알뜰, 알뜰, 알뜰","조국, 조국,조국"
7.
잠깐 쉬어가는 코너. 운해를 보면서 행복을 느낀 이헌태의 '행복론'. 사실 나는 객관적으로 행복하다. 지하철로 출 퇴근하는 길에 구파발을 지나면 창유리밖에 드러난 국립공원 북한산의 기묘한 바위산이 동양화의 한 폭을 보는 듯하다. 청명한 날씨는 두말할 나위도 없고 비오면 비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 오는 대로. 수려한 산의 얼굴을 다양한 형태로 본다.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북한산은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하네요. 일년에 5백만명이 등산했다고 하네요. 산이 안 무너진게 다행이다. 그 분들이 산에서 오줌 한번씩 갈겨도 산이 소금덩어리구만. '소금산'.
서울사람들이 이 바쁘고 스트레스 많은 세상에 그래도 머리가 안 돌고 제 정신으로 사는 것도 다 북한산 덕분이 아닐까 싶다. 북한산은 한국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지켜본 산이며 또한 그 와중에서 서울사람들이 미치지 않도록 의사역할을 한 수호신이다. 북한산이여, 영광이 있으라. 북한산을 너무 찬양했네. 자칫 국가보안법에 걸려서 북한 찬양고무죄로 잡혀 들어갈라. 국정원아짜시들, 좀 봐주이소.
또 세계의 수도 가운데 이렇게 아름답고 큰 강, 한강이 어디 있나. 일출과 석양, 뿌연 안개. 이 역시 자동차로 출퇴근하는 길에 보기 싫어도 억지로 내 눈에 들어온다. 이런 나라에, 이런 도시에 사는게 얼마나 기쁜가. 공자책 첫 페이지를 펼치면 '학이' 편 첫 문장이 바로 "배우고 때맞춰 익히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또 먼데서 친구가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가 나온다. 바꾸어 "북한산과 한강이 있는 곳에 사니, 이 어찌 행복하지 아니한가"
설 하나만 더 풀자. 한국인은 '압축 경제성장'에서 암시하듯이 '압축 스트레스'를 받고 살고 있다. 미국이나 선진국 사람들은 사는게 단조롭다. 퇴근후 일상을 즐기고 주말을 즐기고 휴가를 즐긴다. 스트레스가 작은 편이다. 한국은 반대다. 사회보장제도도 약하고, 먹고 사는게 힘들다. 가족보다 가족이외의 사람들과의 만남이 훨씬 많고 소중하게 여긴다. 사는게 바쁘고 고달프다. '압축 피곤'이다. '압축 파일'이 아니라 '압축 추억'이란 부수효과는 있지만. 동양의 옛 성인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을 자신들의 후손보다는 피부가 다른 서양사람들에 의해 실현되는게 아닌가 싶다.
'행복론'하면 단연 영국이 낳은 철학자 '러셀'의 행복론. 그는 불행의 원인으로 경쟁, 권태 ,자극, 피로, 질투, 죄의식, 피해망상, 여론에 대한 공포를 들었고 행복의 원인으로는 열의,사랑, 가족, 일, 노력과 체념등을 들었죠. 행복에 대한 그의 결론. "자신이 우주의 시민이라고 느끼며 자유롭게 우주가 주는 장관과 환희를 즐기고 자기를 뒤이어 오는 사람들과 자신이 실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할 때도 크게 괴로워하지 않는다. 생명의 흐름과 본능적으로 깊이 결합될 때 가장 큰 환희를 느낄 수 있다". 행복의 본질은 동,서양이 같구만.
이헌태의 행복은 객관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느끼는 주관적인 행복감도 대단하다. 자아도취 속에 산다. 이헌태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행복을 느끼는 지 한번 보실래요. 나중에 "에게게 싱겁다"고 말하지 마세요. 깊은 뜻이 있고 공감할 겁니다. 맞아, "저렇게 평범한게 행복이야"라고 맞장구치실 지도 몰라요. 제목은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 뭐 발표하는 것 같네. 쑥스럽구만.
1. 아침 일찍 출근을 위해 집을 나오면서 아들방과 딸방에 들어가서 너무나 행복하게 자는 모습을 볼 때 (웃기죠. 행복한 자식 보면 나도 행복하니. 그래서 자식들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살아있는 장난감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2. 출근 길에 비가 와서 나무와 풀들이 초록 빛깔로 싱싱하게 빛날 때 (도닦는 사람들처럼 마음이 편해져요) 또 저녁 한강을 따라 퇴근하는데 아름다운 노을이 질 때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관광명소를 공짜로 구경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3. 출근을 위해 고양시 화정역에서 지하철을 탑승했는데 빈 자리가 보일 때 (서울 강남지역의 역삼역까지 한시간 이상씩 서서 가면 스스로 두더지로 변한 것 같아서 몸과 마음이 웬지 찌부덩)
4. 점심시간, 회사 직원들과 꼭 먹고 싶은 음식을 하는 식당에 갔는데 앉을 자리가 남아 있을 때 (맛있는 집은 낮 12시, 정각에 가면 앉을 자리가 없죠. 점심시간때 강남의 중심지 테헤란밸리에서 벌어지는 '먹는 전쟁'도 가관. 정각 12시에 근무자리를 일어서는 게 아니더라구요. 12시에 식당도착시간이 점심시간이 되어버렸어요. 한국사회가 기강이 빠졌나)
5. 건물을 빠져나가려고 회사가 위치한 8층 에레베이터 앞에서 섰을 때 한참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문이 열려 내려갈 때 (8층에는 여성분들이 절대 다수라서 기다리는 게 긴장초조, 뻘쭘하거든요)
6. 귀가해서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온 가족이 나오면서 "아버지 이제 오세요"라며 반길 때 (가족들한테 잘 해 준 것도 없는데. 이런 얘기하면 쪽 팔리는데 사실은 그래도 피곤하고 아플 때 돌아갈 곳은 집밖에 없는 것 같아요. 늦게 철들었나)
7. 집에 일찍 귀가해서 손발을 씻고 파자마로 바꿔 입은 뒤 침대 위에 벌렁 누워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을 때 (싼 값에 인생을 즐기는 것은 책과 비디오가 최고. 인류가 만든 최상의 알뜰 휴식법이라고 봅니다)
첨언 1. 중국 '황산곡'이란 사람은 "선비가 사흘동안 책을 읽지 않으면 스스로 하는 이야기가 무미건조하여 지며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가증스럽다"고 했네요. 책을 많이 읽어 독서의 기쁨도 누리고 특히 이빨과 구라를 늘리자는 이헌태의 철학과 일맥상통한 듯. 안중근 선생의 명언인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힌다"는 수준이구만.
첨언 2. 장자왈, "나의 생명에는 한계가 있지만 지식에는 한계가 없다". 이헌태가 하나 더 붙여. "나의 생명에는 한계가 있지만 책 읽는 기쁨에는 한계가 없으며 책을 통해 얻는 지식도 한계가 없다"
8. 집에 와서 내가 만든 요리에 아들, 딸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최고'라면서 맛나게 먹을 때 (자칭 '김치볶음밥의 대가', 제 원래 꿈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전세계 맛있는 요리를 다 먹어보는 일류요리사거든요)
9. 저녁 늦게 술에 취해 귀가하면서 "별일 없냐"라며 짤막한 대화인데도 대구에 계시는 엄마한테 전화할 때 (아직도 전화할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것 만해도 큰 행복이죠)
10. 외식을 했을 때 가족들이 너무나 애기들처럼 좋아할 때 (처자식이 다른 집이 얼마나 자주, 어떤 메뉴로 외식하느냐를 알면 나의 위상은 급추락. 나로서는 친구간 정보교류를 막는게 급선무)
11. 딸이 재미난 가족 비디오를 함께 시청하면서 나한테 몸을 기댈 때 (아이들 피부는 어찌나 포근한 지, 아버지에게 거부감이 없는 것으로 해석되어 기분좋음)
12. 자식들이 밤 늦은 시간인데도 심부름시키면 즉각 옷을 입고 나올 때 (요즘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는데. 내가 잘 키워서 그렇나, 자식들이 스스로 잘 커 그렇나)
13. 마누라가 시를 쓴다고 습작을 하거나 사색에 몰두해 있을 때 (대단한 여류시인이 탄생될 것으로 확신. 나보다 훨씬 수준 높은 사색가임. 마누라는 백두대간 종주기가 잡글이라고 아예 쳐다보지도 않음)
14. 마누라가 자식들 앞에서 아빠가 밖에서 고생해서 돈 벌어와 너희들 밥 먹여주고 학교 보내고 학원비 대준다고 말하며 방방 띄울 때 (잘하고 있구만. 쬐금 밖에 못 버는데 쑥쓰럽구만)
15. 중2 아들, 초등 2 딸이 서로 '위하는' 모습을 보일 때 (아부지, 오마니 죽고 나면 이 세상에는 피붙이라고는 너희 둘 밖에 없어, 서로 아끼고 사랑해라)
16. 내가 쓴 '백두대간 종주기'를 다시 한번 읽으면서 나 혼자 킥킥 웃음을 터뜨릴 때 (내가 써놓고 봐도 참 재미있더라구요. 머리에 뭐가 그렇게 잡동사니가 많이 들었는지)
17. 좋은 사람들과 만나 양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를 제조하고 돌리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때 (술은 역시 신이 만든 최고의 축복)
18.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병마에 시달리며 혹은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온 가족이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살아 숨쉬는 것만해도 행복이라 했건만. 그래서 오감을 느끼는 눈, 코, 귀, 입, 피부가운데 코가 가장 중요하나. 코가 가장 대접을 못 받고 있지만 코 없으면 숨을 못 내쉬어 그순간 사망. 특히 코만 유일하게 24시간 영업, 코를 존중합시다)
19. 새만금 갯벌 살리기에 앞장은 서지 못했지만 글로써 주변의 사람들에게 필요성을 역설하며 벽돌 한 장을 더 얹었다고 생각했을 때 (평범한 소시민이 정부정책을 바꿀 힘이 있습니까만)
20. 백두대간을 산행하며 산봉우리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름다운 주변 경관을 음미할 때 (대간 산행주기인 3주에 한번씩 해외 여행을 가는 기분과 똑같음. 일반 시민들 가운데 3주에 한번씩 해외 여행을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걸요)
이헌태의 영웅인 소동파는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사람의 일생에 있어 인간은 창창한 창해의 좁쌀 한 알이다" 라고 대답했다죠. 이제 나도 그 정도는 대답하겠다. 좁쌀, 모래, 구름, 번개등등. 극히 보잘 것 없고 순간적인 뜻의 소재만 찾으면 됩니다. 유명한 분들이 말씀하면 명언이고 제가 얘기하면 다 아는 얘기고. 그래서 '유명세'라는 말이 나왔구나.
비슷비슷한 얘기로 불가에서는 "한 목숨이 태어남은 한 조각 뜬구름이 생겨남과 같고 한 목숨이 쓰러짐은 한 조각 뜬구름이 사라짐과 같나니". 지가 뭐 잘 낫다고 잘 난척 하고 사나.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 즐겁게 삽시다.
8.
정상을 향해 행군을 계속해서 새벽 6시 32분 드디어 1248미터 초점산, 일명 삼도봉에 도착했다. 아침 해가 노랗게 퍼진채 동쪽 하늘에 걸려있는 가운데 나아가야 할 북쪽을 제외한 3면에 걸쳐 끝없는 운해가 또 펼쳐져있다.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넋을 잃었다. 감탄, 감탄, 감탄. 뾰족뾰족한 산봉우리들의 집단 섬. 다도해. 바다는 바다인데 쪽빛 물 바다가 아니라 하이얀 구름 바다다. 그 신기를 띤 구름들이 '허허 바다', '여여 바다'에 물결처럼 일렁이는구나.
남쪽에는 한반도 남녘의 터줏대감인 지리산 천왕봉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고 남동쪽에는 수도산과 그 뒤 가야산이 독불장군처럼 버티고 있다. 남서쪽에는 바로 앞 삼봉산, 그 너머 덕유산 향적봉이 겸손하게 얼굴을 살짝 내밀고 있다. 장군급 명산 휘하에 놓인 영관급 산봉우리들이 아기자기한 섬들을 만들면서 광활한 구름바다 위에 떠있었다.
삼도봉 정상에 서있으니 서늘한 바람이 세차게 불어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20년전에는 상상도 못했지만, 세계 제1의 에어컨시장을 확보하고 있는 LG전자에서도 도저히 만들 수 없고 오로지 자연만이 만들 수 있는 '초대형 자연에어컨 바람' 이었다. 맞아 보았나. 서울 사람들 약 오르지. 아파트 거실에서 땀을 질질 흘리는 꼴이, 불쌍한 사람들. 산꼭대기 풀들도 바람에 누웠다. 물결치는 풀들이 푸르름으로 가득찼다. 어느 시인의 글이 생각난다. "바람은 나무를 아로새기고 구름은 봉우리를 두르고 천고의 밀림은 새소리에 한가하다" 오늘 산행에 딱 맞는 표현이다.
삼도봉의 표지석도 백신종선배가 속한 무심산악회에서 실어다 세워 놓았다. 얼마나 좋을까. 잘하면 수백년 이상 보존될텐데. 백선배는 지구상에서 사라져도 무심산악회의 '돌삐'는 영원히 남아 있겠구나.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오만가지 정보가 철철 넘치는 세상에서 이름을 남기는게 예삿일이 아닌데. 싼 값에 흔적 오래가는 방법은 표지석이 왓따구만.
남태평양쪽에 위치한 사이판과 괌, 팔라우 공화국에 가면 이차세계대전 때 징용으로 끌려가서 죽은 한국인들의 억울한 원혼을 달리기 위한 위령탑들이 있습니다. 이 위령탑들은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이용택씨가 자발적으로 민간차원에서 세웠죠. 국가가 할 일을 개인이 대신한거죠. 위령탑에는 이용택이란 이름이 또렷이 박혀있지요. 매년 그분은 위령행사를 위해 그 지역을 방문하죠. 저도 함께 따라가서 열흘간 원혼들의 상흔을 취재하고 돌아 왔지만 이 용택씨는 그 지역 교포사회에서는 영웅이더라구요.
제헌국회이후 국회의원 지내신 분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과연 역사와 국민의 기억에 좋게 남는 일들을 한 분들이 과연 몇 분이나 되겠습니까. 제 애기를 듣고 나서 앞으로 국회의원들이 기념비 세우는 일만 찾아다닐라. 가슴이 끊어지는 참담한 소식. 북한 금강산에 가보니 아름다운 기암괴석과 암벽에 주체사상과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는 문구들이 대문짝만하게 새겨져 있더라구요. 반만년 이어온 民族의 소중한 자산인 금강산을 어떻게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았는지.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네. 단군이 나라를 만든 이래 가장 확실히 역사에 남겠다는 소원은 이루었는지 모르겠으나. 지울 수 없으니. 반대 급부도 있지. 단군이래 가장 욕을 많이 얻어 먹는 기록. '결자해지'라고. 새긴 사람이 빨리 처음 상태로 돌려놓으세요. 원상복귀는 안되겠지만.
잡동사니 하나. 지금이야 큰 소리 치고 사는 미술가들도 사실 중세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예술이나 학문으로 인정받았죠, 그전에야 수공업, 소위 '노가다'로 취급받은 게 사실아닙니까.지금 공사판의 막노동 노가다와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당시 불멸의 명화인 '최후의 만찬'을 그린 미켈란젤로가 조각가가 되려고 하자 아버지는 "내 아들이 하잖은 석수쟁이가 되겠다니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극렬 반대했다고 하네요. 요새 유명한 조각가는 다시 한번 쳐다보는 '예술가'죠.
조각가 얘기가 나왔으니 인간 가운데 가장 악질이 누구인 줄 아세요. 남의 가슴에 상처를 새기고 못질하는 놈. 저의 인생관을 환기시켜 드릴께요. 1.즐겁게 살자 2. 남에게 폐 끼치지 말자. 3. 열심히 살자. 너무 평범한가. 원래 평범한 걸 잘 지키는 사람이 성인 군자죠. 헌태 왈, "평범한 가운데 진리가 있다". 이런 수준의 말 정도는 누가 했지 싶다.
무당도 고려시대 때는 임금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범국민적'으로 모여드는 바람에 무당 집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하네요. 불교가 국교인데도 귀신 찾고 난리가 났는가 봐요.
지금 무당들 부럽겠구만. 숨도 제대로 못쉬고 사는데.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왕검도 무당출신이라고 하니 한국무당인협회분들 구호를 하나 만드시죠. "단군시대때의 영광을 되찾자" 내지는 "고려시대때의 영광을 되찾자"는 식으로. 모르긴 몰라도 그때 무당분들은 우주와 인간사를 꿰뚫고 사회를 이끌 정도로 깊은 도를 깨우친 분들이 아닐까. 무식한 아줌마나 처녀가 갑자기 귀신에 씌워 황당하고 이상한 말을 하는 무당하고는 차원이 다를 겁니다,
참, 근래 도닦는 사람들은 앞으로 조만간 '자신들의 황금시대'가 곧 온다고 잔뜩 기대하고 있다고 하네요. 돈을 가진 사람이 대접 받듯이 도닦은 사람이 대접받는 되는 세상이 온다고 하네요. 제가 뭐 알겠습니까. 열심히 도닦으세요. 혹세무민하고 돈갈취를 안하면 깊은 산골속에 들어가 혼자 도닦든 누가 뭐라 합니까.
같은 뿌리에서 출발해서 지금은 극과 극이 된 직업이 뭔 줄 아세요. 중세유럽에서는 칼날을 취급하는 면도사가 외과의사를 겸했다고 하네요. 이발하면서도 종기째고 고름과 피빼고. 이발소의 상징 삼색등의 의미. 빨간 색(동맥) 파란 색(정맥) 하얀 색(붕대). 18세기 이후에 분리가 되었다고 하네요.
직업도 세상 잘 만나야 돼. 돌아가신 아버님은 연예인들을 보면 늘 '딴따라' 라며 무시했는데, 이제사 자식들이 연예인이 되겠다고 하면 쌍수를 드나 어쩌나. 쌍수라고 하니 고려때, 현재 한국최고 불교 종단인 조계종을 일으켜 세운 지눌대사의 '돈오점수. 정혜쌍수'가 생각나네. 쌍수를 들어 환영의 쌍수가 아니라고요. 죄송합니다. 지눌대사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이 부처임을 단번에 깨닫는 것을 '돈오', 그 이후에도 선정과 지혜를 지속적으로 닦아야 하기 때문에 '점수',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하기때문에 '정혜쌍수'. 그렇다고 하네요. 열심히 수행합시다.
백두대간 능선에서는 수많은 삼도봉을 만난다. 백두대간은 전라도와 경상도, 경상도와 강원도, 충청도와 경상도, 많은 도들의 경계를 이루는 큰 줄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두대간이구나. 백두대간의 의미를 이제야 발견했다. 부력을 발견한 아르키메데스처럼 "유레카, 유레카 (발견했다. 발견했다)"
이미 백두대간산행을 열한번이나 지나오면서 전북과 전남,경남을 갈랐던 삼도봉을 지났고 이번에는 전북과 경남, 경북을 가르는 지점에 닿았다. 어린이 마냥 전북땅을 밟았다가 깡충 뛰어 경남땅을 밟고 또 깡충뛰어 경북땅을 밟고. 잘 놀고 있네. 일 분만에 삼도를 몇번이나 돌았네. 사정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축지법인줄 알겠네.
백두대간은 과거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의 국경선 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두대간은 인간으로서 쉽게 넘을 수 없는 장벽이고 자연성벽이었다. 백제가 아무리 땅을 넓혀도 한강쪽으로 길죽하게 뻗어나갔지 신라쪽으로 가지는 못했다. 진흥왕 순수비의 위치에서 알 수 있듯이 신라가 아무리 번성해도 백제쪽으로 가지 못하고 역시 북쪽으로 길죽하게 뻗어나갔다. 삼국이 한강을 두고 치열한 전쟁을 계속했지만 말이다.
신라와 백제가 한반도에 흘러 들어온 길이 다른 이민족(異民族) 이라는 주장도 있다. 중국책에 삼국시대의 이전, 마한과 진한과 변한의 시대에는 서로 통역이 필요했다는 얘기도 있다도 한다. 현재가 중요. 어찌되었든 고려시대 이후 단일민족으로 하나로 뭉쳐서 천년이상 살아왔다. 오늘에야 한글로 글쓰기를 하고 지역별 사투리가 쬐금 있지만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김치와 된장을 좋아하고, 즉 쓰고 말하고 먹는 것까지 이 정도 같으면 이제는 '완전 하나된 民族, 하나된 나라'로의 조건이 충분하다고 판단되는데 여러분의 견해는 어떻습니까.결론은 싸우지 맙시다. 지역 갖고. 제발. 이 웬쑤들아.
근래에는 도로가 발달되어 백두대간 고개마다 영남과 호남 땅이 이어져 있다. 앞으로 동과 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 똘똘 뭉쳐 다시 한번 '한민족의 기상과 저력'을 세계만방에 떨쳐야겠습니다. 미래에도 세계화 추세가 가속화되면 2백년 후에는 중국과 한국, 일본민족이 서로 뒤섞여 살면서 民族구분이 사라질지도 모르지 않겠어요. 거대한 중국도 한 (漢)대 이전에는 단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했죠. 다민족 다문화 국가였다고나 할까. 동이족이 원래 중국대륙 해안지역에 살았다고도 하네요. 일본의 왕실에 백제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하죠. 이쯤되면 과거의 옛정도 있고 한국, 중국, 일본이 '유럽연합'처럼 '동북아시아 3국연합'을 형성하고 그 행정수도를 한국의 서울로 정할 가능성은 없는가. 모르겠다. 넘어가자.
사실 수천여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 세 민족이 얼마나 피가 많이 섞였겠어요. 원나라와 청나라, 일본이 한반도의 전 국토를 좍 훑어가며 유린할 때 여자들을 가만히 놓아두었겠어요. 너무 심했나. 죄송합니다. 정숙하고 정조가 투철한 한국 여인네들을 한명도 건드리지 못했고 또 만의 하나 건드렸으면 다 자결했지 뭐. 교과서에는 그렇게 나오나, 나도 모르겠다. 임진왜란때 왜군이 마을에 입성하면 딸을 갖다 바치며 영화를 누리려 했다는 매국노도 적잖게 있었다는데, 교과서에는 온통 의병밖에 없으니. 이헌태, 좋게 생각해라. 네.
9.
전진. 삼도봉에서 운해에 취한 감동을 그대로 가슴에 간직한 채 다시 발길을 옮겼다. 삼도봉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오르막길을 타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가면 이번 산행의 정상인 대덕산이 나타난다. 지난 산행 때의 삼봉산 능선에서 바로 대덕산 능선으로 이어지는 코스가 가능하다. 그러나 '물길을 절대로 건너지 않는다'는 백두대간의 대원칙에 따라 소사마을과 삼도봉으로 우회해서 건너온 셈이다. 소사마을에 비가 내리면 한쪽은 낙동강으로, 한쪽은 금강으로 가게 된다. 백두대간의 대원칙이 진짜 실감나는 구만.
삼도봉에서 내려오다가 사고가 생겼다. 시간은 아침 7시. 일행 가운데 한 분이 헛디뎌 얼굴이 바위에 정면으로 부딪혀 피를 흘렸다. 백신종선배와 심상준총무, 김경순씨가 함께 그 분을 데리고 급히 하산했다. 나머지는 다시 산행을 계속했지만.
진초록으로 물들어 푸르름이 가득찬 산을 눈이 시리도록 보면서, 속까지 다 시원한 능선바람을 맞으며, 능선을 타고 가니 기분이 상쾌했다. 소사마을에는 햇살 따가운 해가 뜨면서 거의 사라졌던 운해가 다시 몰려오면서 흐르는 강을 이뤘다. 능선길에는 내 키만큼이나 또는 더 크게 자란 변종 싸리나무들이 산의 꼭대기를 점령한 듯 빼곡하게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바람에 하늘 하늘 휘날리는 억새풀 군락은 왜 이 지역에서 쫓겨났나. 다 사정이 있겠지 뭐.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길만 나있는 백두대간 정글을 헤치며 나아가니 헬기장이 나왔고 조금 더 올라가니 드디어 이번 산행의 최고봉인 대덕산 정상 (1290미터)에 다다랐다. 아침 7시 30분.
정상에 오르니 천지개벽처럼 사방이 훤히 트였다. 북쪽을 제외한 동,서, 남의 세면의 운해만 보다가 마지막 남은 북쪽의 한 면마저 화끈하게 개봉, 나신을 드러냈다. 북쪽에 민주지산(1241미터)도 눈에 들어온다. 비로소 전체의 아름다운 운해가 확 펼쳐졌다. 황홀경, 비경, 경이 그 자체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 속에 회색구름이 살짝 묻어있지만 작은 봉우리들이 일구어낸 다도해의 환상적인 '운해쇼'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일망무제' 대덕산의 운해는 내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있으리라. 이름도 덕이 큰 산. 이렇게 좋은 운해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짜는 없는 법. 나도 큰 덕을 쌓아야지 다짐해 본다.
10.
여기서 발견된 두가지 사실. 동서남북 주변을 둘러보니 한반도 땅은 확실히 용트림하는 공룡들의 등형태를 한 산악지대라것. 아프카니스탄의 산악지대와 흡사. 또 바로 눈앞에 전개되는 지리산과 가야산, 대둔산을 보면서 바로 그 넘어 남해, 동해, 서해가 너무 가깝게 느껴졌다. 조국이 이토록 자그마한 반도인가. 우리 民族은 정녕 대국토를 가진 미국과 중국을, 지난 수천년동안 그랬듯이 앞으로도 눈치보며 받들고 살아야 하는가.
이헌태 왈, "조국이 이렇게 작을 수가" 이에 대해 허정균선배가 이헌태의 이 슬픈 독백을 한 큐에 날리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했다. "우리나라의 하늘은 넓어". 위로의 말씀이겠지만 맞다. 미국의 하늘과 중국의 하늘과 한국의 하늘은 똑같이 넓다. '하늘'이라고 하니 이상한데 같은 말인 '우주'가 무한인 것 아시죠. 허선배처럼 생각하고 살아야지 뭐. 속 편하지.
지구상의 모든 나라가 같은 하늘로도 연결되어 있지만 지구라는 땅으로 다 연결되어있지. 그러고 보니 아래에 있는 뿌리도 같고 위에 있는 하늘도 같네. "지구인은 모두 한 형제".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면 단합해서 뭉쳐야지. 지금 종교, 民族, 빈부, 인종, 남녀등등으로 마구 갈라져 있지만 외계인이 한번 침략하면 자연스럽게 단합될텐데. 외계인이 침략 한 번 안해주나. 제발 한 번 침략해다오. 이헌태, 미쳤구만.
새만금갯벌 살리기운동에 정성을 쏟고 있는 허선배는 늘 "요즘 일 잘 되어가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늘 "잘 될 겁니다"라며 자신감에 차 있는 표정이다. "그럴 줄 몰랐다"면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섭섭함과 비판도 덧붙이면서. 허선배의 한결 같은 주장은 백두대간과 갯벌은 한 몸이라는 것. 백두대간이 골을 형성해서 그 물이 서해로 흘러 강이 되고 그 강이 서해와 만나 갯벌을 이룬다는 것.
허선배는 백두대간도 종주하고 갯벌 살리기도 하니 한꺼번에 두가지 일을 하는 '완벽인간'이구만. 앞으로 '백두대간-새만금갯벌 맨'으로 부르겠습니다. 합쳐서 '백새'. 새 종류같기도 하고. 이상한가. 어쨌든 부럽다 부러워. 영광이 있으라. 허선배가 필명이 '백운'이구나. 이번 대덕산에서의 운해에 걸맞는 이름이구만.
정상의 넓다란 평지에 베낭을 내리고 김밥과 양주 한잔씩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이번 김밥은 여태 사온 김밥가운데 가장 맛있었다. 궁금한 것 하나. 김밥장사든 고기장사든 무슨 장사를 하든 맛있게 하는 집이 있으면 그 집요리를 연구를 해서 으뜸음식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어떤 집은 맛없고 어떤 집은 맛있고. 왜 그런데요. 그게 그렇게 잘 안되나. "니가 해보라"구요. 알겠습니다. 중앙일보 앞에 김치찌개장사로 빌딩 올린 가게가 있어요. 그런 김치찌개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나. 우리 엄마도 그렇게 만드는데. 그것도 비법이라고.떼돈을 버니. 나 원 참.
대덕산 정상에서 본 옥의 티. 씁씁할 장면이 있더라구요. 까마득하게 멀리 보이는 덕유산정상 향적봉 부근에 흉터처럼 볼썽사나운 스키장과 콘도시설장. 자연을 헤치지 않아야지. 저렇게 무식하게 무자비하게 개발해서야. 쩝쩝. 반만년의 아름다운 자연을 그렇게 우리 대에 마구 훼손해도 된다는 거여.
11.
허선배가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한 김에 전직 기자출신으로 나도 한마디. 근래 노대통령에 대해 이런 저런 비판으로 모두들 입을 대고 있더라구요. 보수적인 사람들은 '역시나' 라며 '나라 망칠 대통령'이라고 난리죠. 과거 민주화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반반으로 갈리지만 다수는 반노동자적, 친미정책을 거론하며 "실망했다"며 발끈하고 있죠. 노대통령은 이러다가 이쪽 저쪽 다 적으로 돌려 겨우 10% 지지층을 갖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 아닌가 솔직히 걱정되네요. 그러면 국가적 리더쉽의 표류로 선장없는 배처럼 나라는 엉망진창으로 가게 되죠. 절대로 그래서는 안됩니다. 남의 나라 대통령이 아니고 우리나라의 대통령입니다.
대통령후보 경선전과 경선후, 대통령선거 당선직후와 대통령취임직후, 취임한달과 취임100일후. 현재 이시각까지. 노무현 대통령의 말과 생각은 계속 변하고 있다. 세계 대통령사에 유례가 없는 일일걸요. 저는 이렇게 현실에 적응하는 방향으로 바뀔 것으로 확신한 사람입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건의 사항. 노무현 대통령은 지금 한국의 사정은 세계사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험할 시기가 아니라는데 주목해야 합니다. 새로운 통치스타일, 새로운 이념스타일, 새로운 경제스타일등등. 20세기 들어와서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던 때, 2차대전후 신생국에서 군부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60년대 이후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 이념이 통치로 작동했을 때와는 상황이 다르죠. 안타깝게도 2003년 이 순간에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가 철저하게 망하고 유럽식의 복지국가가 크게 좌절을 겪고 오로지 미국주도의 세계화 자본주의가 이 지구를 평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어떤 통치이념과 통치구상을 가지셨는 지는 몰라도 그 뜻을 펼치시기에는 매우 나쁜 시기에 대통령이 되셨습니다.
우리 앞에는 슬프게도 미국식으로 따라가서 살아 남느냐 아니면 가난한 나라로 전락할 것이냐, 두가지 선택뿐이다. 미국의 똘마니가 되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죠. '친미', '반미'가 아니라 미국을 활용하는 '용미'나 '활미'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쌀이름이가 '도미'같은 생선이름이가.
미국에서도 별로 알아주지도 않는 약소국인 한국의 대통령이 조국과 인류를 구할 새로운 틀을 만들 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독자노선은 국정의 소모적인 시행착오로 이어질 것이며 나라를 벼랑으로 내모는 위험천만한 길입니다. 이 미국식 자본주의 대세를 거스르면 처절한 고통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세상을 좌지우지 하려면 차라리 다음 세상에 미국대통령으로 태어나길 바랍니다. 물론 미국 대통령이라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겠지만.민주당 소속의 클린턴 대통령도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 의원들을 설득하는 일에 정력을 소모했으니까요.
심심산골에서 혼자 나물 뜯어 먹고 살면 모르겠으나 개인이든 국가든 공개광장에 나오는 한, 가난하면 서럽습니다. 불과 100년 전, 조국 조선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대(大) 러시아제국의 대졸 엘리트 미녀들이 몸 팔러 한국에 오지않나. 우째 이런 일이. 러시아제국 꼴 좋다. 지난 70년대 일본의 한국매춘관광을 벌써 잊었나. 가난하면 서럽습니다. 만년 실업자가 동창회에 나오기를 꺼리는 이유를 아직도 모르십니까. 작금의 자본주의 사회는 그렇게 비정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통치 구조와 통치 흐름에 자신만의 장점을 접목시키면 됩니다. 솔직함, 서민적, 탈권위주의적, 유연한 사고, 독립심과 자립심, 깨끗함, 탈중앙적 사고, 부채세력 부재, 인터넷세대와의 호흡등등. 사회의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만들고 사회의 전시스템이 자율경쟁적으로 돌아가게 하면 됩니다. 특히 시장경제를 건드리면 큰일납니다. 성장 속에 분배입니다. 분배를 먼저 생각하다가도 큰일납니다. 노동자들에게는 임금인상보다는 일자리가 상실되지 않도록 해야합니다. 더 나아가 국가전체적 차원의 일자리창출이 더욱 긴요하다.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다른 게 정답이라고 우기지 마십시오. 정권출범한지 얼마되었습니까. 아직도 시간은 충분합니다. 괜찮은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세상 호락호락하게 여기면 노대통령 본인은 물론 나라도 다 망칩니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노대통령께서 자신의 생각이 다 맞다고 생각하면 큰 코 다칩니다. 남의 생각도 맞는 게 많습니다. 자본주의가 고칠 게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의 화신도 아닙니다. '세계화'가 꼴 보기 싫다고 외면하면 '네계화'가 아니라 '무계화' 즉 '황당무계화'가 된다. 장황하게 뻔한 얘기해서 죄송합니다. 수긍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노대통령은 미국의 실패한 대통령인 '카터의 덫'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바로 이어진 레이건 대통령은 미국의 힘과 꿈을 얘기했지만 카터는 미래를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카터는 대통령 전용요트도 없애는 탈권위주의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심지어 전기비를 절약하는 바람에 백악관이 추워 근무자들이 벌벌 떨었다고 하네요. 정의, 인권과 이상주의, 기독교에 입각한 도덕적 우월에 입각한 통치를 했습니다. 이게 바로 카터의 함정입니다. 비사교적이어서 부부 외에는 별 친구가 없었다고 하네요. 위싱턴의 사교와 거래를 싫어했고 국회 상대설득이 없었다고 하네요.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카터 정권기간 동안 실업자가 크게 늘고 인기가 최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탈권위주의했고 전기비를 아꼈고 정의와 인권을 부르짖었습니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렇게 했습니까. 카터를 절대로 따라 하지 마십시오. 권위주의가 좋다, 전기를 펑펑 쓰라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 아시죠. 단순 도식적으로 얘기하면 대통령은 '선한 사람'이 앉는 자리가 아닙니다. '영민한 사람'이 앉는 자리입니다.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해서. 국민의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위해서.
12.
대덕산 정상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오전 8시 15분 일행은 북동쪽 방향으로 난 대간길로 다시 나섰다. 사방이 녹색 물감을 뿌려놓은 듯 초록 신록이 싱그러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평 능선을 따라 한참을 가니 비로소 내리막으로 이어졌다. 샘물 약수터가 나왔다. 비가 온 탓인지 수량도 많았고 물맛도 좋았다. 모두들 배를 잔뜩 채우고 물통도 채운 뒤 행군을 계속했다. 모처럼 산죽군락을 보니 옛동무를 만난듯이 반갑다. 대간길을 가다보면 한국의 산에는 참나무와 소나무, 산죽이 가장 흔하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면 철학자가 된다. 나무의 철학. 바람의 철학. 물의 철학. 산의 철학, 생명의 철학. 달의 철학등등. 헤아릴 수 없는 자연의 철학을 음미하게 돼죠. 대간길에서 만나는 샘물은 생명수다. 따라서 물의 철학을 잠깐 소개. 만만한게 홍어 뭐라고 일단 공자, 노자말씀.
공자선생님부터. 공자는 제자 자공으로부터 "공자님, 강물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자, "물이란 것은 군자에 비유할 수가 있다. 물은 널리 베풀어 모든 사물을 살아나게 하니 덕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물이 닿으면 바싹 말라 죽어가던 생물이 다시 살아나니 어질다고도 할 수 있겠지. 또 물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신을 낮추며 내려가지. 굽이칠 때도 순리에 따라 흘러가니 외롭다고도 할 수 있겠다. 얕은 곳에서는 흘러가지만 깊은 곳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으니 이것은 몹시 지혜로운 모습이다. 백길이나 되는 절벽에 이르러서도 아무런 의심 없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면 물은 참으로 큰 용기를 지녔다. 졸졸졸 흘러서 보이지 않게 먼데까지 이르는 조심스러움도 갖추었고 아무리 더러운 것도 사양하지 않고 다 받아들이니 마음이 넉넉하다고도 할 수 있다. 지저분한 것들은 받아들여 깨끗하게 씻어서 내보내니 이것은 나쁜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물은 얼마나 훌륭한 스승이냐 그래서 나는 저 강물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아아 , 나도 저 흘러가는 강물을 닮고 싶구나"
자연이 인간의 스승이니까 당연히 자연의 한 구성원인 물도 인간의 스승이구만. 인간은 자연을 닮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강물도 닮아야 하는구만.
공자께서 말씀하셨는데 라이벌인 노자께서도 팔장만 끼고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도덕경에 '상선약수' (上 善 若 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가정집 거실 액자에 '상선약수'라는 문귀가 더러 더러 있었는데. 노자님의 '공자님' 같은 말씀이죠. 말이 되나 모르겠다. 서로 자존심상하나.
노자는 '도경(道 經, 세계의 구성원리)'에서 왈 1.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살 때는 낮은 땅에 처하기를 잘하고 마음 쓸 때는 그윽한 마음가짐을 잘하고 벗을 사귈 때는 어질기를 잘하고 말할 때는 믿음직하기를 잘하고 다스릴 때는 질서있게 하기를 잘하고 일할 때는 능력있기를 잘 하고 움직일 때는 바른 때를 타기를 잘 한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어라" 한마디 한마디가 2천 5백년이 지났는데도 주옥 같은 말씀.
노자는 '덕경(德 經, 원리에 입각한 실천)'에서 왈 2. "세상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러함에도 견고하고 강한 것을 물리치는 것에 물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그것은 그 본성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것을 천하에 모르는 자가 없지만 진실로 행하는 자가 없다". 이 말씀은 인간들이 구분 지어서 그렇지 자연에는 원래 차별도 없고 승패도 없고 귀천도 없고 선악도 없다는 뜻이라고 하네요.
동양의 대표적인 성현들인 공자와 노자가 물에 대해서 한말씀 하셨는데 결론은 물이 대단한갑다.
아줌마 밥 한공기 추가요가 아니라 잡동사니 추가요. 하나, 이조말 거상 임상옥은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며 말년에 재산을 환원하고 시를 쓰며 보냈다고 하네요.
둘, 당태종의 '정관정요'에 실린 말로 신하 위징이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라며 상소를 올렸다고 하네요. 물이 '생명수'이면서도 반대로 '사망수'도 되네. 임금과 대통령의 필독서인 '정관정요' 에는 "그릇에 담긴 물은 평평하다"는 말도 있거든요. 공평무사한 인재등용을 강조한 대목이죠.
셋. '물'이 나오는 퇴계 이황의 시 두편이 멋지다. 가재를 보고 지은 시. "돌을 지고 모래를 파니 집이 저절로 지어지는구나. 앞으로 가고 뒤로 달리니 발도 많구나. 한 움큼의 물이면 사는데 충분한데 강과 호수에 물이 얼마나 있는지 물어서 무엇 하리". 인간에게 던져주는 '자족과 무욕'의 메시지. "쌀이 있고 산이 있고 책과 벗만 있으면 된다"는 말씀.
보너스 하나 더. 맑은 연못을 보고. "이슬을 머금어 윤이 나는 풀들이 연못에 둘러져 있고,연못은 맑고 깨끗하여 먼지 하나 없구나.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그를 지나쳐 날아가는 새들이 잘 어울리는데, 고요한 물을 제비가 헝클어뜨릴까 마냥 걱정이 되는구나". 한국의 대철학자가 걱정도 팔자지. 그런 걱정을 다하나. 머리는 걱정으로 꽉 찼겠구만. 농담이고요. 고요한 물을 헝클어뜨리는 제비처럼 욕심이 자신의 마음을 헝클어뜨리지 않기를 바랬다는 깊은 뜻이라고 하네요. 선현들의 옛날 시는 참 좋은데, 현대의 절대다수 시는 머리만 지끈지끈. 이황 만세.
옛날 분들의 물 관련 발언만 모아도 책 한권 되겠다. 물이 이렇게 좋은 뜻으로 다양하게 성현들의 입에 오르고 내릴 줄이야. 고려 최영장군이 '황금을 돌 보듯 하라" 가 아니라 '황금을 물 보듯 하여라"라고 고쳐야 할 판. '물태우'라는 대통령이 계셨는데 그분은 공자, 노자가 말한 물의 깊은 이치와 도를 깨우친 대통령인가. 모르겠다. 물은 아쉽지만 이것으로 끝.
마지막, 물도 수준이 있는 거 아세요. 티끌 하나 없이 거울 같이 비치는 물, '명경지수' 라는 말도 있지만 룸싸롱에 가서 "애들 물 좋다"는 말도 있어요. 근래 극심한 경기불황으로 '물장사가 잘 안된다'고 하던데. 그런 물은 안 좋은거네. 더 야한 물도 있는데. 여기까지. 이헌태 품위관리 좀 해라. 네. 공자님과 노자님께서 말한 물은 이런 물하고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한국이 장차 '물부족국가'라고 하네요. 국민 여러분, 물을 아껴습시다.
13.
백두대간 산행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대간 능선을 따라 봉우리와 재 (고개, 령)의 지겨울 정도의 끝없는 되풀이라고 할 수 있죠. 봉우리에 올라 까마득히 저 아래에 놓여있는 재를 보면 내리막에 기분도 좋지만 반대로 어깨에 힘이 쭉 빠지죠. 또다시 땀을 뻘뻘 흘리며 가파르게 올라갈 산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기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나오죠. '똥개훈련'인가. "이 짓을 왜 하나.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인생은 산행과 같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내리막이 있으면 또 오르막이 있다. 대간산행 동안 몸에 체득한 귀중한 교훈이다. 산에 갈 때마다 일깨우니까 속세인보다는 더 이 같은 생각이 더 다져져 있다. 마음의 준비든 행동의 준비든, 미리 미리 준비하면 슬픔과 고통이 줄어들지요. '유비무환'.
재를 보고 다시 올라갈 생각으로 한숨을 쉬면 그때마다 유영래 대장 왈. "그런 생각하지 말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가다보면 된다"라며 달랜다. 오전 9시 33분쯤, 이번 산행을 나선 후 큰 봉우리를 몇 개 건넌 뒤 가장 움푹 꺼진 덕산재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한 일행들이 김천과 무주를 잇는 도로 옆 풀밭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내가 속한 그룹은 늘 꼴찌다. 이번 산행은 새벽 일찍 출발했고 예정된 코스가 평소보다 짧아서인지 표정들이 여유를 부리는 모습이다.
대간 산행하면서 목격하는 것은 영남과 호남을 잇는 고개마다 아스팔트 도로가 산뜻하게 닦여 있으나 이용하는 차들은 별로 없었다. 하여튼, 나라 어디를 가 봐도 도로는 다 잘 닦여 있는 것 같았다. '건설공화국'의 위용을 보는 듯하다. '친환경적이고 생산적인 도로건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쉬어가는 얘기. 백두대간 산행도 재미있으니까 다니죠. 오를 때 매우 힘들어도 기쁨이 수십배, 수백배 되니까 늘 가고 싶죠. 저희가 '극기훈련'하고 '인내테스트'합니까. 기독교든 불교든 모든 종교라 할 지라도 재미있게 믿으세요. 오로지 천국을 가기 위해서 누가 가자고 해서 억지로 내키지 않는데도 교회나 절에 가면 며칠 못 갑니다. 주변이 그런 분들이 적젆게 있더라구요. 행복하지 않습니다. 뭐든 자기가 하는 일에 재미가 나야하고 신이 나야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은.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재미나게 하면서 살다가 죽는게 정답입니다. 맞습니다. 맞고요.
어떤 스님 말씀, "삶에는 정답이 없다. 오답이라고 후회할 것도 없고 정답을 찾으려 애쓸 것도 없다. 그냥 그냥 다 받아들이면 그대로 정답인 것이다" 알겠습니다.
인생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습니다. 사는 동안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돈 적게 들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드릴께요. 만원짜리 책을 사서 느긋하게 읽고, 천원을 주고 좋은 비디오를 빌려서 온 가족이 다정하게 관람하고, 만원어치 분량의 고기를 사서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야외에서 구워 먹고 난 뒤 손잡고 산책하고, 주말에는 아름다운 산을 골라 오르면 돈이 얼마 들겠어요. 극단적이지만 맞벌이 부부의 한해 수입이나 가장의 연봉이 2천만원 정도가 되어도 행복이 가능하다는 얘기죠. 한국에서는 노가다를 해도 이 이상 벌죠.한국가정의 암적인 존재인 '과외비'도 부모가 직접 도와줘서 어느정도 해결할 수도 있는 것. 서민들을 울리는 주택값이 큰 문제네. 정부 좀 잘하세요.
어쨌든, 돈 적게 들이고 행복하는 법 가르쳐 드렸습니다. 제가 시키는대로 꼭 한번 실천해 보세요. 쥑인다니까요. 늘 말하잖아요. 잘 산다고 권세가 있다고 행복하면 세상은 벌써 무너졌다고.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은 추종자가 한명도 없어 실업자가 되고 배곯을 걸요. 왜냐하면 돈 많고 벼슬 높으면 인생이 가장 행복한데 왜 그 분들을 찾아가겠어요. 다 그게 안되니 성직자들이 존재하죠. 누가 그렇게 만드셨는지는 몰라도 인간도 참 잘 만들었고 세상도 참 잘 만들었네.
14.
오전 9시 47분 다시 길을 나섰다. 산쪽을 한번 올려다 보니 대략 30분 정도 부지런히 오르면 대간능선길에 접어들 것 같았다. 산행을 자주 하다 보니 높이나 거리만 봐도 소요시간이 대충 감에 잡힌다.
이번 산행에도 꼴찌들은 똑같다. '만년 꼴찌'. 나를 포함 허정균, 손석규, 장정도 네명. 이번산행에 모처럼 '자연 박사'인 손선배가 나타나 신이 났다. 나무와 풀에 대한 상식에 대한 갈증이 해소된다. 대간길 주위를 수북 장식한 클로바 모양의 정갈한 풀의 이름이 '천남성', 흔히 '찰남생이'라는 것도 가르쳐주었다. 천남성 풀을 모아 찢어서 연못에 뿌리면 고기들이 수면위로 떠오를 정도로 독초란다. 코르크 병마개를 만드는 굴피나무도 알려주었다. 참나무도 얼마나 종류가 많은지.
헉헉 숨이 턱에 차며 30분쯤 올라가니 무명의 '883'미터' 봉우리에 다다랐다. 이내 다시 내리막길에 나섰다. 이 지역에서는 어른 손바닥 두배 크기의 가랑잎이 달린 떡갈나무가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었다. 가을에 열리는 까만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진금나무도 보였다.
오전 10시 20분쯤 능선길에 큰 흉터처럼 생긴 공터가 나왔다. 임도까지 연결되어 있고, 뭔가를 개발하다 방치했는지. 해는 중천에 떠있고 안개는 걷혀 사방의 푸른 산들이 온전한 몸을 드러냈다. 초록의 고운 융단을 깔았다. 언덕배기에 앉아 경치도 눈요기하면서 휴식을 취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손석규, 정장도 두 선배가 오지 않았다. 거의 반시간 가량 기다렸나. 길을 잘 못 들었다고 한다. 이번 산행에서는 '프로 선수'들이 실수가 많구만. 산은 '프로선수'라고 봐 주는게 없구만. 매정하구만.
북북서방향으로 오르락 내리락 능선을 타고 가다가 정오를 넘긴 낮 12시 15분쯤 역시 무명의 '853미터' 봉우리에 도착했다. 산아래 저밑 무주군 무풍면 막실이란 마을이 유럽의 시골풍경처럼 그렇게 풍요롭게 비쳐질 수가 없었다. 적당한 크기의 논밭과 그에 딸린 집들이 띄음 띄움 흩어져있는 모습. 한국의 농촌현실을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깬다. 저렇게 곡식을 일굴 대지를 갖고 있어도 살기가 힘들까. 답답한 노릇이다.
옆길로 새어, 나도 언제가는 농촌으로 돌아가야지. 빠른 시일내에. 이헌태, 니도 동양인의 피는 못속이는구나. 국민 여러분, 동양의 이상은 '안빈낙도', '태평성대'. 서양의 주제는 '희망과 전진'. 꿈도 서양에서는 '쟁취의 대상'이지만 동양에서는 '몽유도원도'로 표현되죠. 철학도 서양에서는 '지(知)에 대한 사랑'이지만 동양에서는 수행을 통한 '지행일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도 동양인이구만.
산행때마다 마지막 봉우리에 올라 서면 언제나 기쁜 것. 언제 갈까 싶어도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도착하는 평범한 이치. 종착지인 부항령으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대간길은 인적은 끊겼지만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면서 사색의 시간으로 안성맞춤이다. 갑자기 독사가 나타나 스스러 지나간다. 독사가 사람을 피하는 것을 보니 사람이 독사보다 더 독한 모양이다. "인간은 천사도 될 수 있고 악마도 될 수 있다". 신이 될 수는 없나. 기독교에서는 될 수 없고 불교에서는 될 수 있다고 했나요.
독사가 나왔으니 '천 개의 고원'을 지은 유명한 학자인 질 들뢰즈의 주장. "만남이란 무엇일까. 가령 독은 사람을 죽게 만들기 때문에 나쁜 만남이다. 그러나 뱀은 독을 이용해 자기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좋은 만남이다. 이렇게 '선'과 '악'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무엇과 무엇 사이에 어떤 관계가 수립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독사가 자기 몸만 보호하면 뭐 하나 남을 죽이는데 나 원 참. 들뢰즈씨, 이헌태 앞에서 얼렁뚱땅 넘어가면 설득당할 줄 아셨죠. 뱀은 인간사회에서 찍혔다고 봐야죠. 낙원에서 이브를 유혹한 이후. 들뢰즈씨는 일흔살 때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했다고 하네요. 생과 사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고 관계되었다는 것을 실험하기 위해 모험적으로 자살했는가.
불교에서는 "성내는 마음으로 호랑이, 뱀, 벌과 같이 독하게 되고 가벼운 마음으로 새, 나비가 되고 좀스런 마음으로 개미, 모기가 되고 탐심내는 마음으로 배고파 우는 귀신이 되고 탐심, 성냄 마음이 크면 지옥이 되고 일체 마음이 다 여러가지 것이 되어가니 일체 여러가지 마음이 없으면 곧 부처가 된다"라고. 성질 내면 호랑이 뱀, 벌로 태어나는 구나. 내가 범띠생인데.
15.
낮으로 접어들면서 해는 아침 때, 안개속에서 다소곳하던 수줍고 은은한 얼굴을 버리고 뜨겁게 이글거리는 해로 바뀌어졌다. 덥다. 수건으로 땀을 연씬 닦아낸다.
마침내 부항령 고개 바로 위의 능선까지 다다랐는데 대간길을 계속 직진하면 삼도봉과 민주지산으로 향한다. 일행은 까막득하게 아래에 놓여있는 도로쪽으로 하산했다. 터널 절개지 언덕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 있었다. 해는 더욱 지글지글 끓는 가운데 칡넝쿨이 도처에 무성했고 올들어 처음으로 본 고추잠자리가 바쁘게 노닐고 있었다. 너무 햇빛이 강렬하고 열기가 후끈거려 부황증걸린 사람 처럼 노랗게 떠겠다. 그것도 부항령에서. 부항령 이름값하네.
김천과 무주를 연결하는 부항령 고개에는 삼도봉 터널이 뚫여져 있었다. 입구에 간이식당인 주막이 있었다. 꼴찌 4명의 주막 도착 시간, 오후 1시 26분. 한시간 이상 기다렸다고 한다. 오늘은 '꼴찌'가 아니라 '골치'구만.
다행스럽게도 병원에 갔던 분들까지 포함, 죽치고 앉아서 시원한 시골잔치국수를 먹고 난 뒤 부추전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뒤늦게 꼴찌 4명도 국수를 말아 먹었다. 캬, 그 맛을 누구 알리요. 너무 너무 너무 맛있었다. 늘 말하잖아요. 시골 사람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도 먹는 것은 신라호텔 요리보다 더 낫다구요.
국수로 배를 잔뜩 불리고 막걸리로 얼큰하게 취했다. 오후 2시에 서울로 출발했다. 엎친데 덮친격. 일진이 이상했다.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서울로 오다가 안성 부근에서 코란도 차 한대가 일행이 탄 전세버스가 가는 전용도로에 갑자기 뛰어들어 부딪치면서 날아가버렸다. 옆차를 계속 받아 4중인지, 5중인지 다중 충돌 사고가 났다. 코란도 운전수가 크게 다쳤다고 하는데. 전세버스는 앞부분이 다소 망가졌으나 모두 기적적으로 멀쩡했다. 천만다행이다. 전세버스 기사 분이 그 사고 와중에도 핸들을 잘 잡아 돌려 무사했다고한다. 지옥갔다 왔구만. 같은 회사에 소속된 다른 전세버스가 와서 일행을 실고 귀경했다.
귀경길은 안개가 자욱해서 시계거리가 10미터도 되지 않았다. 안개속에 소사마을에 내려 안개속에 서울로 입성했다. 전에 한번도 없었던 사고가 한꺼번에 몰쳤던 것도 안개 때문인가. 큰 사고를 막는 액땜이었으리라. 기분도 이상해 일행은 모처럼 고속버스터미널 상가에서 순대국에 쐬주를 한잔 더 걸쳤다. 나는 계룡산을 등반하고 온 선배들에 의해 차출되어 인근 고기식당으로 불려가서 저녁 10시 반까지 엄청 퍼 마셨다. 그 집 복분자술이 떨어질 때까지. 3호선 대화역행 지하철을 타고 오다가 깜빡 잠이 들어 종점까지 왔다. 자정 가까이 된 시간, 택시를 타고 푸근하고 정다운 '나의 화정집'에 도착했다.
오늘은 정력제를 두 가지나 먹었다. 곰발바닥이나 뱀탕 요리같은 수준이하의 음식이 아니고요. 부추 아시죠. 경상도 말로 정구지. 불가에서의 이름은 '파옥'. 가정이 깨질 정도로 정력을 키우는 나물. 스님들의 '기피 1호'. 그리고 전라도의 대표적 술. 복분자. 오광을 뒤엎을 정도로 오줌빨이 세진다는 술. '부추전에 복분자술'. 너무 야했나. 이 넘치는 정열을 어떻게 했을까요. 궁금하시죠.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결론은 별로 든데.
열두번째 백두대간 산행은 장마 속에서 비 맞으면서 '악천고투'하는 산행이 될 줄 알았는데 예상을 깨고 너무 황홀경인 운해를 본 '행운의 산행'. 안개속에서 출발해서 안개속으로 사라져간 '유령산행'이 아니라 '안개 산행'이었고 이에 덧붙여 아쉬운 '사고 산행'이었다. 청명한 날씨 속에 속이 다 시원한 자연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행군한 '퍼펙트 날씨 산행', '대만족 산행'이었다. 술취하면 나타나는 이헌태의 증상인 '중언부언', "대덕산의 운해, 내 가슴속에 영원하리라. " (6월 28.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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