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효종 때인 1654, 1658년 2차례에 걸쳐 러시아를 정벌한 일. 1650년대 러시아 군대가 청나라 영토 흑룡강유역에 자주 남침, 청나라와 충돌한다.
청은 이 때 중국 본토 공략에 몰두하고 있어서 만주 수비가 허술했다.
그 결과 청군의 1차 정벌군은 러시아군에게 패퇴 당하고 말았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고 조선은 조총군인 150명을 파견, 청군과 더불어 지금의 의란 지역인 호통(好通)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쳤다.
제1차 나선 정벌이다.
제2차 나선정벌은 1658년 청의 요청에 따라 신유를 대장으로 200명을 파견, 흑룡강에서 러시아 배 10척을 불태우고 적군 270명을 사살한 전투를 말한다.
여기에서 나선은 러시안(Russian)을 음역(音譯)한 것이다.
▶서기 400년=백제와 동맹을 맺은 왜가 신라를 침략하자 신라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고구려 광개토왕이 보병과 기병 5만을 파병, 왜병을 토벌했다.
이 원정을 통해 고구려는 신라, 가야지방까지 진출했다
▶서기 927년=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 수도 경주를 공격했다.
견훤의 공격을 받은 신라의 경애왕은 고려 왕건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왕건이 신라를 돕기 위해 출전했으나 원군이 도착하기 전 신라 수도 경주는 이미 견훤의 군대에 점령됐다.
경주에 입성한 견훤의 군사들은 약탈을 자행하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던 경애왕을 붙잡아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했다.
뒤늦게 신라에 도착한 왕건은 견훤군을 공격하기 위해 공산(현재 대구시 팔공산 일대)에 군사를 대기시켰다.
약탈한 수많은 보물과 포로를 끌고 귀환길에 오른 견훤군은 여기서 고려군의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전투는 공격을 감행한 고려군의 대패로 끝났다.
고려의 장군 김락과 신숭겸이 죽고, 많은 군사가 전사했다.
고려왕인 왕건도 간신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서기 1619년=후금의 누루하치가 심양을 공격하자. 명나라는 조선에 지원병을 요청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김경서 장군을 보내 명군을 원조하되 상황을 봐가며 향배를 결정토록 했다.
명나라 군대가 청군에 패배하자 강홍립 장군은 후금에 항복하고 이번 출병은 조선의 본의가 아니라 명나라의 강요에 의한 것임을 해명했다.
명의 요청에 따라 출병은 하되 후금과 싸우지 않는 광해군의 양면외교는 명과 후금 모두를 자극하지 않는 유연한 외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