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따스한 연말을 보내자

입력 2003-12-11 09:20:30

어느덧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여인들의 옷차림에서 계절이 바뀌는 것을 감지할 수 있듯이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를 듣는 순간 문득 연말이 다가왔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왜 그럴까? 연말의 스산한 풍경 속에 울려퍼지는 자선냄비의 종소리는 우리에게 따스함을 나누자고, 일년에 한번쯤 잊고 지냈던 불우한 이웃들을 생각하자고 호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되돌아 보면 올 한 해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날들이었다는 생각이 앞선다.

무엇하나 희망을 갖게 만드는 신바람 나는 일이 없었다.

정치권은 정쟁으로 날을 지새우고, 각종 비리의혹이 난무하는가 하면 노사갈등이 첨예해 지는 가운데 경제는 침체되어 청년실업자가 크게 늘고 이념대립으로 사회가 사분오열되는 등 마치 '대한민국호'가 난파되는 것이나 아닌지를 걱정해야 했던 한 해 였다.

그럼에도 '대한민국호'는 난파당하지 않고 그럭저럭 항해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가 할 일을 다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소리없이 불우한 이웃들과 나눔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까닭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 불우이웃을 돕는 재단과 종교단체는 물론 수 많은 자원봉사회원들과 개인들이 없다면 우리 사회의 한 귀퉁이는 벌써 무너져 버렸을 것이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불우이웃을 돕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신문에 자주 보도되고 있다.

서울 성동구에 있는 27개 구립 어린이집 아이들 2천여명이 일년 내내 용돈을 아껴 저축한 돼지저금통을 털어 모은 돈 400만원쯤을 결식아동들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이런 일을 7년 동안 계속해 오고 있다는 것이다.

전국의 결식아동은 현재 1만4천여명이다.

그 아이들이 모은 돈으로 얼마나 많은 결식아동에게 점심을 제공할 수 있을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돈의 액수보다는 그런 일을 통해 어린이들이 곁의 어려운 친구들에 대해 생각하고 이웃에 대해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불우이웃돕기와 봉사활동은 산 교육이다.

해양수산부 공무원들이 모인 '행복한 사람들의 모임'(행사모)의 경우 매주 한번씩 점심시간을 이용해 서울 종로구 체부동에 있는 중증장애아 보호시설인 '라파엘의 집'을 찾아 장애아들을 돌보고 있다.

3년간 지속해 오고 있는 이 봉사활동에 142명의 동료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구태여 이 사례를 드는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불우이웃을 돕는 것은 반드시 시간이 많아야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사례를 보자. 지난 12월3일 부산시내 요구르트 배달 아줌마 1천200여명이 시청광장에서 불우이웃에게 전달할 김장김치 7천500포기를 담갔다고 한다.

1kg 들이 상자 2천500개 분이다.

이 김장김치를 소년소녀 가장들과 무의탁 홀몸노인들에게 전달한다고 했다.

현재 전국에는 64만여명의 홀몸노인이 있고 137만여명의 기초생활보장수급자가 있다.

요구르트 아줌마들의 김장김치 나누기가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지극히 일부에게 한정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그들의 나눔을 통해 반드시 돈이 많아야 이웃돕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서 부자보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잘 불우한 이웃에 대해 배려할 줄 안다는 것을 실감하며 산다

앞에 든 세가지 사례는 어떤 대표성을 지니는 경우는 결코 아니다.

최근에 신문에 보도된 것 가운데서 임의로 인용했을 뿐이다.

우리는 여기 인용된 것과 같은 불우이웃돕기 사례가 무수히 많을 뿐만 아니라 봉사유형도 다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선공연은 물론 오는 21일 경기도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릴 홍명보선수가 주선한 2002월드컵 스타선수와 프로축구 K리그 올스타 등 40여명이 소아암으로 투병하는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자선 축구경기도 다양한 봉사활동의 하나다.

올 해 연말은 경기침체로 인해 더욱 스산하고 움츠린 가운데 보내게 될 것 같다.

그래서 따스함을 나눌 여유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따스함은 많이 베푸는 데서 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작은 나눔 속에서 스스로 정다움을 만들어 가는 정성이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유 재 천

한림대 한림과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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