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시인 고은(70)씨의 인간적 고뇌와 문학적
발자취가 생생하게 담긴 일기가 '불나비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계간 「문학과 경
계」 겨울호에 처음 공개됐다.
고씨는 첫 회분으로 1973년 4월 6일부터 7월 7일까지 93일간의 일기를 공개했다.
"또 봄이 온다. 나는 봄이 싫다. 만물 소생, 너도 나도 천박해진다. 뚝새풀의
징그러운 생명력"으로 이어지는 첫 날 일기에는 고씨 특유의 지독한 허무주의가 배
어난다.
고씨는 김구용 시인의 일기에 자극을 받아 70년대 초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으
나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여러 차례 가택수색을 당해 초기 3-4년간의 공책을 잃었다
고 한다. 이에 대해 그는 "무교동 낙지골목 시절이 지워진 셈"이라고 밝혔다.
고씨가 사십대에 접어든 1973년 이후의 일기는 민음사, 신구문화사, 「한국문학
」 창간 준비 사무실 등이 있던 서울 종로구 청진동과 그해 4월 15일 이사한 화곡동
집을 주무대로 전개된다.
대지 86평에 건평 21평 짜리 화곡동 집을 장만할 수 있었던 것은 민음사 박맹호
사장의 누나가 자신의 원고료를 잘 저축해줬기 때문이라고 한다. 연희동에서 화곡동
으로 이사한 것은 시인 신동문과 가까이 살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사연도 일기에 적
혀 있다.
이 시절 고씨가 자주 만나 '술마시고 놀던' 문인들은 최인훈, 김현, 이청준, 김
치수, 이문구, 홍성원, 이형기 등이다. 민음사 박맹호 사장과는 거의 매일 만나고
있다. 「신동아」에 연재를 시작한 '이중섭 평전'의 취재를 위해 화가 이중섭의 가
족과 주변인물들을 만나는 장면이나 김병익 등 신문사 문화부 기자들과 술자리에서
어울리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나는 문학전집을 읽지 않고 문학을 시작했다. 나는
근본적으로 무사승(無師僧)이다"(4월 8일), "나는 대학도 군대도 모른다. 결핍 투성
이다"(4월 13일), "1960년 4월 19일. 나는 해인사 승려였다. 나에게 4.19 콤플렉스
가 있다"(4월 19일) 등 시인의 내면을 드러내는 자기고백에 관한 글들이다.
"식모 정숙에게 꿀밤을 한 대 먹였다"(4월 16일), "차장과 말다툼을 했다. 미친
년이라고 욕했다"(4월 19일), "이웃집 담 쌓는 문제로 몇 마디 싫은 소리를 냈다"5
월 19일) 등 일상사의 부대낌도 드러난다.
"달콤한 작가, 달콤한 계집, 달콤한 언어들을 살육하라"(4월 13일), "시는 늘
불만과 만족 사이에 있다"(4월 22일), "왜 시인은 학만 노래하고 참새는 노래하지
않는가. 시인에게는 박애가 불가능하다. 진짜 시인은 범신론자여야 한다. 유일신주
의는 시를 죽인다"(5월 30일) 등 문학적 고민을 드러내는 기록도 발견된다.
"(최)인훈은 평가에 과민하다"( 4월 9일), "이청준은 웃음이 잘 발달하지 않았
다"(4월 11일), "(오)규원한테는 사범학교나 사범대 냄새가 난다"(5월 22일), "앞으
로 서정주는 찾아가지 않을 것 같다. 서정주, 황순원들이 그곳(사당동)에 산다. 유
령들의 거처"(5월 27일), "김현과 만났다. 그와의 얘기는 끝이 싫다. 민음사는 점점
인문적인 분위기가 익어간다"(6월 4일), "최정희의 소설을 심심해서 못 보겠다"(6월
20일), "송영, 유행가를 썩 잘 불렀다"(6월 27일), "(박)재삼에게는 웃음밖에 없다.
속 깊은 울음은 꼭꼭 숨어 있다"(7월 4일), "나는 서양놈 중에는 러셀을 제일 좋아
한다"(7월 7일) 등 문단 동료에 대한 짧은 인물평 등도 자주 나온다.
"전태일이라는 청년의 분신자살. 그 평화시장 시멘트 바닥의 불덩어리. 빛이란
거짓이다. 인간은 어둠이다"(4월 13일), "평화시장 헌 책방을 돌았다. 문득 생각났
다. 전태일이 스러진 곳이 어디일까 하고 청계천 저쪽을 보았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6월 12일) 등에서는 전태일의 죽음이 그를 반독재 민주화운동쪽으로 이끌고 있음
을 보여준다.
'불나비의 기록'이라는 일기제목은 1959년 인쇄소 화재로 소실된 첫 시집 「불
나비」에서 따왔다.
한편, 「문학과 경계」의 발행인인 이진영(시인)씨는 "고 시인이 계속 연재하겠
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에 어느 시기까지 일기가 공개될지 아직 모른다"면서 "2회분
부터는 정치.사회적 격변기를 지나면서 겪은 문단의 숨은 이야기가 많이 공개될 것"
이라고 말했다.(연합뉴스)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