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파도로 탑을 쌓는 사람들

입력 2003-12-03 09:14:27

겨울 바다에 나가 본 적이 있는가? 계절이 쇠잔하고 지쳐서 잠잠할 것 같은데, 매서운 찬바람은 파도의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눈앞에 요동치는 풍경은 너무도 치열한 나머지 차분하고 아늑한 평화가 없다.

겨울 바다는 이제 노년을 향해 저무는, 한 해를 온 몸으로 느끼는 한 학자의 마음과 어쩌면 그리도 닮았는지?

불어오는 바람 앞에 하얀 눈동자를 뒤집는 파도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목이 쉬도록 외친다.

그래서 고싸움 하듯 계속 일어서며 부딪치고 허물어진다.

밀려오는 파도로 구층탑을 쌓아본들 무엇하리요만, 밀려오는 것에 맞서 밀려가는 존재의 허무함이 너무 힘없어 파도도 사람도 힘이 드는 것이다.

명예란 무엇인가? 나이 들수록 제일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명예라고들 하는데, 어쩌면 허무한 존재들이 파도처럼 쓰러지면서 잠시 일궈낸 물거품이 아닌가? 누가 허공에 더 크게 치솟고 더 큰 거품을 토했는지 떠드는 가운데 저마다의 입술에 오르는 이름들은 입에서 입으로 오가면서 오늘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은가? 명예를 얻고자 할수록 불명예를 먼저 차지하게 되니, 종래에는 비포장도로를 질주한 자동차 꼴이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탐하지만 않으면 얻어지는 것이 그것인가? 두만강 물에 칼을 씻고 삭풍에 휘파람부는 것도 한 때는 영웅의 호기였지만, 지금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천지의 푸른 물에 풍진 세상 묵은 때를 씻어버리는 것이 더 큰 호기 아닐까? 오늘날 소위 우리 사회의 명사들은 죽어 다비를 하면 타버린 몸뚱이에서 사리가 몇 개나 나올까? 사리 한 톨 나오지 않는 몸뚱이를 지키고자 살아서는 재를 뿌리고, 죽어서는 재를 남기고, 이것이 사리에 맞는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가벼운 바람이라도 일면 재도 이름 석자도 모두 흩어져버리고 마니, 명예의 허망함을 알면서도 눈보라 속에 나비를 쫓는 이유가 무엇인가?

대개 저승에서만 즐길 수 있는 것 (immortality)을 이승에서 미리 가불해서 즐기는 자를 명예롭다 할 것인가? 권력과 명예 모두를 가질 수 없기에 힘없는 자들이 매달리는 것이 명예 아닐까? 그러나 명예가 있는 곳에 이목이 있고, 이목이 있는 곳에 부자유가 있나니, 그런 불편함과 고생을 사서한단 말인가? 눈부신 명예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 다니는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그러나 평범한 삶도 싫더라, 자유가 너무 많아도 지겹더라, 헐떡거리더라도 등산에는 높은 산이 좋더라. 세상에 손목을 내밀고 수갑을 좀 채워달라 애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지금 이 세상은 어느 누구를 위해 월계관을 엮고 있는가? 과연 누구의 이름이 청동에 새겨지고 있는가? 창살 없는 감옥에 들어가기를 자처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는 그런 고생에도 불구하고 과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기억은 흐르는 물과 같아 파도에 이름을 새겨본들 금시 거품이 되어 망각의 바다로 잦아드나니, 헛되고 헛된 것이 이름이요, 명예 아닌가? 차라리 해안선을 배회하는 갈매기로 하여금 허공에 자기 이름을 쓰게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렇다고 명예를 부정적으로만 볼 것인가? 알려지는 것이 그렇게 덧없는 일인가? 푸르타크의 말처럼, 만일 테미스토클레스가 알려지지 않았다면 누가 크세륵세스가 이끄는 페르샤의 침공으로부터 아테네를 구할 것이며, 로마인들에게 카밀리우스가 없었다면 어찌 갈리아 인들의 손에서 로마를 구할 수 있었겠는가? 만일 충무공이 천거되지 못해 함경도 궁벽한 지역의 조만만호나 정읍의 현감에 머물러 세인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그렇다면 명예야말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를 지킬 수 있는 영원히 녹슬지 않는 방패 아닌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는 명예롭고 존경받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인구가 줄어드는 것도 문제지만, 명예로운 인간이 줄어가는 현실은 더욱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명예 보다는 불명예, 소문 보다는 추문을 통해 알려지고 있다.

우리가 어릴 적만 해도 존경하는 위인들이 한 두 명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모델들은 어느덧 희귀종자 (rare species)가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부정적인 모델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인격과 가치관을 형성해 나간다.

모방하기 보다는 저항을 해야 하는 모델들 말이다.

위대한 시인이 있기 위해서는 위대한 청중이 있어야 하고, 위대한 학자가 있기 위해서는 학문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하는데, 수많은 학교와 학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교육열은 아이러닉하게도 학문은 물론 학자들의 싹마저 시들게 하고 있다.

명예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회 또는 시대에 사는 사람은 설사 불만이 없다 해도 그것으로서 그의 삶은 불명예이다.

땅에 떨어진 것을 원래의 위치로 일으켜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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