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째 살란 말이고"

입력 2003-11-21 11:24:16

지긋지긋 했던 풍수해와 그로 인한 대흉작. 어렵다 어렵다 하는 농촌은 정말 얼마나 어려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눈물겹다.

추수를 끝낸 농민들의 영농결산서는 보기에도 애처롭다.

그러나 정부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농민들의 목소리를 단순히 투정쯤으로 여기고, 실상 모르는 도시민들은 "엄살 아니냐"는 몹쓸말까지 한다.

농촌은 막다른 궁지로 몰리고 있다.

돼지값 생산비에 못미쳐

▨ 처참한 영농 결산서

영양군 석보면 택전1리 김병록씨는 추곡수매를 앞두고 벼를 말리면서도 좀처럼 신이 나지 않는다.

가을철 수확의 기쁨을 맛본것은 까마득한 옛일. 올 가을에는 더욱 기가 죽고 어깨도 처진다.

2년 연속 쭉정이 농사에 절망감을 더하는 영농자금 상환 독촉장 때문이다.

김씨의 올해 농사 결산서를 보자. 김씨는 올해 담배 1만4천평과 고추 2천평, 배추 2만평, 벼 1천200평을 경작하는 복합영농을 했다.

생산비는 인건비로 담배농사에 2천400만원, 배추농사 500만원 등 줄잡아 3천만원, 여기에 농지임대료 700만원, 건조기 기름값 600만원, 비료.농약값 550만원, 씨앗값 100만원 등 합하면 5천만원이 넘는다.

소득은 잎담배 수매로 5천만원, 벼 100만원이 전부다.

고추와 배추는 태풍과 병충해로 단 한푼도 건지지 못했다.

산술적으로 약 5천만원을 투자해 5천만원의 소득을 냈으니 본전이다.

그나마 다행일까? 일년간 뼈 빠지게 일한 김씨부부의 노력은 간 곳 없다.

빚이 더 문제다.

이제까지 농사를 지으면서 농협에 진 빚이 2억원, 2년째 이자를 못내 올해 연체 이자만 4천만원 이상 늘게 됐다.

허울좋은 본전치기 농사 때문이다.

양돈농가인 안동시 풍산읍 박모(45)씨. 연간 2천마리 가량 출하할 수 있는 규모. 돼지콜레라와 구제역 파동으로 13개월전부터 최근까지 돼지값이 생산비에 2만원 이상 못미쳐 고스란히 5천만원을 손해봤다.

게다가 운영자금이 달려 고금리의 외상 사료를 사용하는 바람에 이자지출 800만원이 추가됐다.

인건비와 기타 생활비 3천만원. 합해서 1년사이 1억원 가까이 적자가 났다.

양돈을 시작한후 15년만에 처음으로 농협대출금을 연체시키고 있다.

벌써 7개월째다.

태풍이 강타한 영양군의 주작물 고추도 나을게 없다.

고추재배면적은 1천987ha로 작년보다 330ha 줄었지만 생산량은 절반이 감소한 2천329t에 그쳤다.

감산으로 가격은 올랐으나 30~40% 정도여서 지역전체 고추소득은 지난해 보다 무려 100억여원이 줄어 250억원에 그쳤다.

담배도 100t이 감수돼 소득이 지난해 77억원에서 67억원으로 떨어졌다.

인구 2만8천명, 농사가 주소득원인 지역에 농사소득이 110억원이나 감소한 파장은 불문가지다.

농업경영인들 속속 탈농

▨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나는 부채

안동시 모농협의 농민대출총액은 460억원, 이중 상호자금이 330억원, 정책자금이 130억원으로 연체비율이 작년보다 2% 정도 불어 12%를 넘었다.

조합원중 약 10%가 신용불량자로 등록돼 영농자금도 빌리지 못하는 처지다.

내년에는 농사를 짓고 싶어도 농비를 마련하지 못해 주저 앉을 판이다.

농협도 심각한 경영압박을 받고 있다.

부실채권을 순전히 자체적으로 책임져야할 상호자금 대출이 정책자금 보다 월등히 많고 부채비율도 높아 농민과 공멸하는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때문에 농촌의 보루라는 농업경영인들이 속속 농촌을 떠나고 있다.

그것도 막다른 골목에서 택한 극단의 야반도주다.

안동과 의성,영양지역에서 최근 3년간 40여명이 이렇게 농촌과 등졌다.

능력도 없지만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농협 빚을 갚지 않으려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안동시 서후면 하모(53)씨는 "농촌이 이지경인데 정부의 대책은 생색에 그치고 있다" 고 했다.

최근 농가부채경감안과 FTA 협상 체결과정을 예로 들었다.

"농가빚 70% 이상이 상호금융자금인데 이를 대상에서 제외하고 농업시장개방을 서두르면서 국내 농산물 보호대책을 포기하다시피한 것은 농민을 우롱하는 처사"라며 "정부가 농촌의 피눈물나는 실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준다"고 개탄했다.

농민들은 "이대로는 농민들의 봇물시위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며 "농협부채에 대한 연체해소와 이자율 3%대 감년조처 등 특단이 있어야 돌파구를 만들 여력이 생긴다"고 했다.

안동.정경구.엄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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