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풍-사마귀의 도끼

입력 2003-11-20 14:00:04

인구 4천800만명, 수출 1천185억 달러, 외자유치 130억 달러, 경제성장률 12.6%. 얼른 보면 한국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중국 개혁.개방의 상징인 광둥(廣東)성의 요즘 모습이다.

인구 4천800만명, 수출액 1천625억 달러, 외자유치 40억 달러, 경제성장률 2.7%가 우리의 실상이다.

누가 봐도 광둥성의 발전 잠재력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 22개 성 중의 하나인 광둥성이 우리의 국세와 비견되고 있다.

이렇게 되는 데는 25년이 걸렸다.

덩샤오핑(鄧小平)이 78년 12월 "정책을 줄테니 죽도록 싸워 한국을 따라잡아 보라"고 지시한 결과다.

전세계 컴퓨터 10대 중 3대가 이 곳에서 만들어진다.

"한국을 따라 잡아라"

앞으로 10년 뒤 광둥성에는 인구 4천만의 세계 최대 도시들이 들어설 것이라고 한다.

주장(珠江)삼각주 지역이 바로 그곳이다.

광저우(廣州), 선전, 주하이(株海)의 인구는 현재 700만∼1천300만명 선이다.

이들 지역들이 고도성장을 바탕으로 거대 경제권을 형성하게 되면 인구 4천만으로 불어나게 된다는 전망이다.

창장(長江) 삼각주의 상하이(上海)도 그런 도시의 하나다.

지난해 말 인구가 벌써 1천600만을 돌파했다.

상대적으로 발전이 늦은 북부지역도 외자 유치가 늘면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랴오닝(遼寧)성, 지린(吉林)성, 헤이룽장(黑龍江)성은 한국.일본 기업과의 합작을 통해 국제적 생산기지로 탈바꿈했다.

인구 800만의 산둥성(山東省) 지닝(濟寧)시는 더욱 극단적이다.

외자유치 이후 실업률이 줄어들어 시의 경제성장률이 14.7%에 이르고 있다.

지닝시는 한국과 일본 기업 유치를 위해 기업별 맞춤서비스까지 해준다.

값싼 땅이 필요하면 땅값을 깎아주고, 전력소모가 큰 업종은 전기료를 내려준다.

상하이(上海)가 유치한 한국업체를 빼앗아 오기도 했다.

상하이의 절반 값으로 땅을 공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3일만에 공장허가를 내줬다.

외자유치를 위해서라면 도시 이름까지 바꿀 수 있다는 혁신에 들떠있다.

미국의 정치.경제 전문잡지 '포린 어페어스'의 '2002년 국제화지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62개국 중 31위를 차지했다.

세계 12위의 경제 규모에 비해 국제화가 영 안된 나라다.

한국의 폐쇄성은 경제 분야에서 잘 나타난다.

외국인 직접투자 잔액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에 불과하다.

싱가포르의 85%, 중국의 40%에 턱없이 못 미친다.

전 세계적으로 체결된 자유무역협정(FTA)은 172개나 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하나도 없다.

세계무역기구 142개 회원국 중 둘 뿐인 '비(非) FTA국'이다.

미국의 외교저널 '포린 폴리시'는 2003년 세계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62개국을 대상으로 세계화 정도를 조사한 바 있다.

여기서도 한국의 세계화지수는 28위에 머물렀다.

인터넷 사용이 12위 이내에 들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그 아래다.

기술(15위)과 교역(23위)이 그나마 나은 수준이고, 정치는 33위, 경제는 40위를 기록했다.

개인의 세계화지수는 42위, 외국인 직접투자는 50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경제규모나 국세에 비해 국제화.세계화 정도는 발바닥 수준이라는 말다.

특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개인의 세계화 지수다.

국민 일반이 '세계화 문맹' 수준에 머물고 있다.

우리의 치명적 결함이다.

요즘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도깨비에 홀린 듯 전 국민이 자신만의 이념, 자신만의 요구, 자신만의 주장을 부르짖는다.

시위를 업으로 삼는 국민들이 늘어나 뉴스에서 시위가 빠지는 경우를 보지 못한다.

더 난해한 것은 시위의 심리상태다.

구국의병 활동 하듯 시위를 벌인다.

자기도취에 빠진 주장과 요구들을 내놓으며 열사까지 등장시킨다.

돈키호테들의 나라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다.

당랑지부(螳螂之斧)라고도 한다.

사마귀가 제 힘만 믿고 앞발의 도끼를 들이대며 수레를 가로막는다는 뜻이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과 비슷하다.

우리가 지금 그 짝이 아닐까. 자기의 죽음을 가져올 지도 모르는 세상 수레바퀴를 눈 아래로 보고 도끼날을 세우는 꼴이다.

어제 열린우리당 김원기 공동의장이 자기 당에 인기만 노리는 돈키호테들이 너무 많다는 화두를 던지고 휴가를 떠났다.

돈키호테들이 열린 우리당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사회 곳곳의 돈키호테들이 나라의 발목을 잡고 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지난 9개월 동안 우리가 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산성 있는 논의는 간 곳 없고, 그저 지지고 볶는 일에만 열중했다.

바깥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고민해보지도 않았다

중국의 도약상을 구차스레 열거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쇄국적 사고를 벗어나지 않으면 한국에게는 미래가 없다.

지금의 주장과 요구가 어느 날 수레바퀴에 산산조각 날 수 있다.

그 때 후회하면 늦다.

모두가 목소리를 낮추고 수레바퀴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큰 진실은 굽어 보인다고 한다.

지금의 맞은 말들이 그때 가서는 눈멀고 귀먹은 미망(迷妄)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진용(논설위원)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