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옥입니다-물러남의 미학

입력 2003-11-18 09:15:45

일본 최초의 여성 당수, 최초의 여성 중의원 의장 등을 지낸 도이 다카코(74) 사민당 당수가 생애 최대의 시련을 맞고 있다.

최근 총선에서 사민당이 대패하여 풍비박산이 난 데다 12선의 자신도 지역구 낙선의 충격을 맛봐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치의 신천지를 개척해 온 여걸이지만 깨끗이 물러나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미적거린 것이 큰 오점이 되고 말았다.

해마다 봄이면 남해안을 붉게 물들이는 동백은 참 묘한 꽃이다.

대개 꽃들은 그 아름다움이 시들고 시들어 끝내 흉한 모습으로 변하고 말지만 유독 동백은 한창 고울 때 눈물처럼 후두둑 떨어진다.

누가 분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모가지째 뚝, 뚝, 떨어지는 그 모습엔 일말의 미련도 없어 보인다.

어떤 이는 선혈(鮮血)같아서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지만 그야말로 '문득 있던 것이 문득 없는'(김훈의 수필 '돌산도 향일암') 그 경지가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경이롭기까지 하다.

동백의 그런 모습에서 '물러남의 미학(美學)'을 찾아본다면 지나치려나.

삶의 절정에서 물러난다는 것. 말은 쉽지만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특히 우리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에겐 '명예', '권력', '부'라는 것은 없어서 그렇지 마르고 닳도록 지키고 싶은 최상의 가치로 여겨진다.

적당한 때 스스로 물러난다는 건 이상주의자, 몽상가의 헛소리로 치부되어 버린다.

게다가 '가문의 영광'이니 '동문의 영광'이니 하며 실낱같은 인연의 끈에라도 매달리려는 우리 사회에서 영광의 빛이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을 때, 그것도 스스로 물러난다는 건 과문의 소치일지 몰라도 별반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지난 10년간 캐나다를 이끌며 '캐나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정치인'으로 꼽히고 있는 장 크레티엥 총리가 최근 고별연설을 갖고 내년초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7천 여명의 청중들이 노정객의 은퇴를 기립박수로 위로한 이 자리에서 크레티엥 총리가 한 말이 멋있다.

"이제는 떠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즐겨야 할 나이가 됐다"…. 다른 사람들이 좀 아쉬워할 때쯤 떠날 줄 아는 사람이 진정 멋있는 사람 아닐까. 김형기 시인의 시 '낙화(落花)'가 새삼 절절하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전경옥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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