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대가야(20)-야광조개의 비밀

입력 2003-11-17 14:31:02

본열도의 남단, 가고시마(鹿兒島) 항구. '여왕의 해안'이란 꼬리표가 붙은 거대한 여객선에 올랐다.

20세기 타이타닉호가 머리를 스쳐갔다.

갑판 위에 서니 멀리 가고시마현의 활화산, '사쿠라지마'가 비껴서 있었다.

지금 '타이타닉호'를 바라보며 검붉게 끓고 있는 저 산은 1천500여년 전에도 20명 안팎이 탄 자그마한 목선을 지켜보았을 터. 수일을 거센 풍랑과 싸우며 배를 저었던 당시 대가야인들은 얼마나 많은 목숨을 잃었을까. 소금과 조개를 싣고 바다로 나왔던 왜인들은 또 얼마나 희생됐을까. 수백 명을 태우고 달리는 거대한 배, 1시간 남짓한 시간에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오가며 떴다 내려앉는 비행기를 상상이나 했을까.

'타이타닉호'는 남으로 383km 떨어진 '아름다움을 숨긴 큰 섬', 아마미 오시마(奄美大島)를 향해 부웅 부웅 기적소리를 냈다.

거대한 뱃머리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도는 고요했고, 바람은 거셌다.

소금과 조개를 부리고, 대가야의 철과 토기를 싣고 되돌아오는 왜의 목선에 탄 기분이랄까.

아! 아마미 오시마. 11시간을 달려 도착한 섬은 아름다웠다.

수천 년의 세월에도 인간의 때가 그렇게 많이 묻지 않은 고즈넉한 섬이었다.

400~500년대 오키나와 유구왕국에 속했던 이 섬은 본토의 간섭을 받지 않고 중국과 일본, 가야제국과도 교류했던 곳이다.

일본 에도(江戶)시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영주가 다스렸던 가고시마 지방에 복속된 땅, 가고시마현 아마미 오시마군. 섬의 북단에서 남단까지 승용차로 4, 5시간 거리였다.

하얀 백사장과 시퍼런 물결이 맞닿은 아마미 오시마의 북동쪽 가사리쵸(笠利町) 바닷가. 바닷바람을 쐬며 무심결에 바라본 언덕에 눈길이 쏠렸다.

야광조개였다.

경북 고령 지산동 44호 무덤에서 나온 바로 그 조개였다.

흥분을 감추기가 쉽지 않았다

수백, 수천 리 바닷길을 타고 넘어 경남 해안까지, 그리고 다시 육지를 거슬러 대가야의 도읍지로 간 것이었다.

1천500여년 전의 일이었다.

나카야마 기요미(中山淸美) 가사리쵸 역사민속자료관장은 당시 야광 조개국자의 제작법을 재현하고 있었다.

400년대부터 200~300년 동안 만들어진 조개국자였다.

국자 완성품은 돌이나 쇠로 깨고 다듬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기요미 관장은 딱딱한 조개 외투막을 들고 껍질을 깨부수고 있었다.

외투막으로 조개껍질의 몸통 부분을 떼내고 다듬질하니 지산동 무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기요미 관장은 "순전히 조개껍질과 외투막으로 국자를 만든 뒤 돌로 만든 도구로 정교하게 마무리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 조개국자가 대가야까지 갔다니 놀랍다"고 말했다.

한국의 읍.면 단위에 불과한 가사리쵸의 역사민속자료관에는 출토된 야광조개 국자는 물론 그 지역의 동물, 식물, 농기구 등 민속자료가 풍부하게 진열돼 있었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는 그렇게 읍.면 단위에서 시와 현으로, 나아가 국가의 역사와 정체성을 지키고 발전시켜 결국 세계화의 밑거름이 되고 있었던 것.

아마미 오시마 항구가 있는 나제(名瀨)시의 동쪽 해안, 이세기 유적지. 일대 수천평에 조개무지가 발견 된 곳이었다.

수천, 수만의 조개껍데기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동행한 다카나시 오사무(高梨修) 나제 시립아마미박물관 학예원은 "500년을 전후한 시기의 이세기 조개무지에서 야광조개 국자가 출토됐다"며 "유적지마다 야광조개가 몇 점씩만 나오는 것으로 봐 당시 지배층의 제사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고령 지산동의 왕 무덤에서도 이 야광조개 국자가 출토돼 당시 대가야와 왜 지배층간 정치적 교섭을 시사했다.

마미 오시마에서 만난 기요미 관장을 비롯해 구로에 마쓰오(黑江益男) 가고시마현립 오시마군 북고교 교장, 도다 유키코(當田由紀子) 나제시 남해일일신문 기자 등은 경북 고령과 아마미 오시마와의 공식적인 문화 교류를 희망했다.

야광조개 국자로 상징되는 대가야와 왜 사이의 정치.문화적 교류를 1천여 년 뒤인 지금 새롭게 이어가자는 것이었다.

아마미 오시마에서 바라본 바닷가에는 그 때 대가야의 목선이 해류를 타고 출렁이고 있는 듯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협찬=경북도.고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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