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어떤 임금님이 밤중에 예사 사람 옷차림으로 대궐 밖에 나가서 백성들 사는 모습을 살폈는데, 강가에 가 봤더니 웬 선비가 막 물에 빠져 죽으려고 그러더래. 사람이 물에 빠져 죽으려고 하는데 보고만 있을 수 있나. 얼른 가서 붙잡고 말렸지.
"여보시오, 대체 무슨 일로 목숨을 함부로 버리려고 하시오?"
"남의 일에 상관 마십시오".
"글쎄, 까닭이나 좀 알아봅시다".
그랬더니 선비가 한숨을 쉬면서 하는 말이,
"내가 지금까지 과거를 모두 열두 번이나 봐서 열두 번 다 떨어졌습니다.
글공부를 안 한 것도 아니요 게으름을 피운 것도 아닌데, 운이 나쁜 건지 다른 까닭이 있는 건지 과거를 보는 족족 떨어지다 보니 어느덧 나이 쉰이 넘었습니다.
이제 식구들 볼 면목도 없고 세상 살 마음도 없어져서 차라리 죽자 하고 이러는 것입니다".이러거든. 임금님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참 사정이 딱하단 말이야. 이 사람을 도와 줄 길이 없나 하고 궁리한 끝에 좋은 생각이 번쩍 떠올랐어. 그래서 얼른 선비에게 말했지.
"그러지 말고 한 번만 과거를 더 보시오. 마침 사흘 뒤에 대궐에서 임시 과거가 열린다 하니 좋은 기회가 아니오? 이번에는 임금이 손수 문제를 낸다는데, 답이 '솔개 연'이랍니다.
'솔개 연'이라고만 하면 합격이 될 테니 잊지 말고 꼭 새겨 두시오".
그렇게 해서 선비를 타일러 보내고 대궐로 돌아왔어. 그리고 사흘 뒤에 임시 과거를 베풀었지. 임금님이 손수 문제를 내는데, 삼백 걸음 밖에 깨알 만한 글자를 한 자 써 붙여 놓고 읽으라고 했어.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왔지마는 글자를 읽을 재간이 있나. 그 먼 데 있는 작은 글자를 무슨 수로 읽어? 그래서 보는 족족 다 떨어졌어. 응? 그게 무슨 글자냐고? 그야 '솔개 연'자지.
이윽고 물에 빠져 죽으려던 그 선비가 왔어. 와서 보니 아니나다를까 임금님이 손수 문제를 내는데, 먼 데 써 붙여 놓은 글자를 읽으라고 하거든. 사흘 전에 들었던 말이 있어서 막 대답을 하려고 하는데, 아뿔싸, 그새 잊어버렸네. 까맣게 잊어버렸어. '솔개 연'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거야.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생각이 안 나. 한참만에 겨우 조금 생각이 났는데, 뭔가 하늘에서 뱅뱅 도는 것만 생각나거든. 솔개가 하늘에서 뱅뱅 돌잖아. 그래서 대답을 한다는 것이,
"뱅뱅이 연".이랬어. 이래 놓으니 될 리가 있나. 덜컥 떨어졌지. 임금님도 참 안타깝지마는 어쩔 수가 없으니까 혀를 차며 선비를 그냥 내보냈어.
이 선비가 대궐 문을 딱 나오니, 그제야 '솔개 연'이 생각나는 거야. 그렇지만 이제 와서 생각난들 무슨 소용이야? 그 때 마침 한 시골 선비가 과거를 보러 대궐 문으로 들어가기에, 이 선비가 다 이야기를 했어. 자기는 '솔개 연'자가 생각이 안 나서 '뱅뱅이 연'이라고 했다가 떨어졌으니 자기 대신 '솔개 연'을 꼭 맞춰서 붙으라고, 신신당부를 했지.
시골 선비가 그 말을 듣고 임금님 앞에 가서 천연덕스럽게 아뢰었어.
"임금님, 저 글자를 서울말로 아뢸까요, 시골말로 아뢸까요?"
"아니, 그게 시골말도 있다더냐?"
"예, 서울말로 하면 '솔개 연'이고 시골말로 하면 '뱅뱅이 연'이지요".
"옳거니. 그러면 '뱅뱅이 연'도 맞는 거로군".
임금님이 좋아라하면서 아까 그 선비를 다시 불러들여 합격을 시켜줬다는 이야기야. 서정오(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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