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대가야(18)-낙동강을 마주보며...

입력 2003-11-03 08:56:20

전북 남원시 아영면 두락리. 연비산 동~서 방향 능선에 무덤 40여기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동쪽으로 백두대간, 서쪽으로 황강이 뻗어 있고 운봉고원과 아영들이 펼쳐진 곳. 이 곳에서 불과 1.5km 가량 떨어진 아영면 월산리에도 10여기의 무덤이 보였다.

섬진강 상류의 백제와 백두대간 팔랑치를 넘은 대가야가 맞부딪칠 수밖에 없는 요충지였다.

월산리 무덤에서는 400년대 전반, 소가야(경남 고성) 양식 토기와 400년대 후반 대가야 양식 토기가 나왔고 두락리 무덤에서는 400년대 후반 대가야 토기만 출토됐다.

소가야 세력에 이어 대가야가 진출한 지역이었다.

이 두 지역 무덤 서쪽에는 아영들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아막산성(650m)이 솟아 있었다.

성안에서는 가야토기, 백제토기, 백제기와 등이 출토됐다.

가야가 처음 성을 쌓은 뒤 백제가 성벽을 구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영들과 아막산성을 둘러싼 곳. 대가야와 백제가 피를 흘리며 뺏고 뺏겼던 이른바 '기문' 지역이었다.

경남 하동군 섬진강 하구. 대가야가 바닷길로 나가 왜나 중국과 교류하기 위해선 반드시 뚫어야 했던 교통로였다.

낙동강과 동해는 신라가, 서해는 백제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고소산성(300m). 지금까지 백제토기와 신라후기 토기만 확인됐지만, 대가야가 백제에 대응해 쌓은 성의 유력한 후보지로 꼽히고 있다.

하동은 바로 해양 진출과 대왜 교역을 위해 대가야와 백제가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대사'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경북 고령군 성산면 강정리 봉화산토성. 낙동강 건너 대구 달성군 논공읍 위천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군사들의 집단행동은 물론 조각배 한 척의 움직임도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대였다.

강 건너에는 신라의 보루성이 버티고 있었다.

그 곳에서 북쪽으로 달성군 논공읍과 마주한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산성도 봉화산 토성과 함께 낙동강 건너를 조망하고 있었다.

신라에 맞서 대가야의 동쪽 국경을 방어하던 최전방 기지였다.

300년대 전반, 변한 소국(반로국)에서 '가라국'으로 거듭난 대가야는 562년 멸망할 때까지 백제, 신라, 왜와 한편으로 전쟁을 치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연합하거나 교류하며 세를 넓혀 나갔다.

대가야는 300년부터 100년 동안 비상을 앞둔 독수리가 날개를 움츠리듯 주변 정세를 적절히 활용하며 내실을 다졌다.

경남 합천 야로의 야철지에서 철제 무기와 농기구를 만들어 농업생산력과 경제력을 높이고, 대가야 양식 토기의 생산에 전념했다.

당시 한반도는 2강(고구려, 백제), 2약(신라, 가야) 구도였다.

고구려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바탕으로 313년과 314년, 낙랑.대방군 등 중국 한군현 세력을 쫓아내고, 요동지역 진출을 꾀했다.

백제는 동쪽으로 강원도 춘천, 서쪽으로 서해, 북쪽으로 경기도 예성강까지 땅을 넓힌 뒤 300년대에는 농업생산력을 크게 높이고, 가야와 왜에 영향력을 뻗쳤다.

369년엔 가라(고령), 남가라(김해), 안라(함안), 다라(합천), 비자발(창녕) 등 가야 7국을 친백제 세력으로 끌어들이고, 이듬해엔 가야의 대외 교통로인 하동(대사)을 장악해 왜와의 교통로도 확보했다.

신라는 고구려에 의존하면서 안으로 왕권확립에 힘을 쏟았다.

대가야는 고구려와 백제가 영토확장을 위해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사이 상대적으로 안정적 성장을 꾀할 수 있었다.

이같은 고구려.신라-백제.가야.왜의 양대 축은 400년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정(南征)'으로 분기점을 맞았다.

신라의 요청을 받은 광개토왕이 5만 병력으로 임나가라(경남 김해) 종발성까지 치고 내려가면서 백제가 대패하고, 임나가라와 안라국(경남 함안)도 큰 타격을 입었다.

대가야는 이를 계기로 가야제국 중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광개토왕의 남정에도 별 피해를 입지 않았던 대가야는 김해세력 대신 백제와 왜를 잇는 교역 중개역할을 맡으며 전면에 부상한 것이다.

400년대 신라는 눌지왕이 즉위한 뒤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고대국가의 기반을 닦으며 친 백제 성향으로 돌아섰다.

대가야도 친 백제, 친 신라 정책을 고수하며 성장했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의 새 판이 짜여진 것이다.

475년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숨지고, 한성(서울)이 함락돼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겨야 했다.

당시 격변기를 잘 활용한 대가야는 고구려, 백제의 영향을 받지 않고 가야제국을 아우르며 안정적 기반을 닦았다.

급기야 479년에는 중국에 사신을 파견, 국제무대에 우뚝 섰고, 481년에는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신라에 침입하자 백제와 함께 원군을 보내 이를 격퇴시키는 등 막강한 군사력도 과시했다.

그러나 500년대 정국 안정을 되찾고 왜와의 활발한 교섭을 벌이며 동진책(東進策)을 폈던 백제와 가야제국 복속을 꾀하며 서.남진하던 신라의 틈바구니에서 대가야는 전쟁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512년 백제는 대가야의 해양진출 거점이던 전남 여수.순천.광양 등지 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등 4현을 왜와 함께 공격해 빼앗고, 이듬해엔 당초 백제영역임을 내세워 전북 남원분지(기문)의 회복을 시도했다.

514년 대가야는 경남 진주(자탄), 하동(대사)에 봉후와 저각을 갖춘 성을 쌓아 백제와 왜에 대응했다.

또 경남 의령(이열비)과 창녕(마수비)에 성을 쌓고 신라와 격전을 벌이며 영토 사수에 나섰다.

대가야는 이후 500년대 중반까지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거나 백제 및 가야제국과 '임나부흥회의'를 갖는 등 다각적으로 활로를 모색하다 결국 가야제국을 완전 장악하지 못한 채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된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고령)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사진: 하늘에서 내려다본 경북 고령군 성산면 강정리 봉화산토성(사진의 아래 부분). 가야군은 옛날 신라의 영토인 낙동강 건너 대구시 달성군 화원면 위천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봉화산토성에 진을 치고 이웃 신라를 견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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