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북, 우리 발목 그만 잡아야

입력 2003-10-21 11:25:10

햇볕정책의 결과 '북한이 변했다, 변하지 않았다' 이런 논란이 있다.

무엇을 보고 변화를 얘기할 수 있는지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세상에 변화란 항상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북한에 변화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변화를 햇볕정책의 결과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런데 북한 당국이 북핵문제와 관련하여 보이는 언행을 보면 북한에 과연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강한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평양에서 지난 주 열린 제 12차 남북장관급회담은 사실상 결렬 수준에서 끝났다.

북측은 장관급회담이 열리는 도중에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때가 되면 핵 억지력을 공개하는 조치가 취해질 것"이라는 대단히 도발적인 발언을 했다.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온 우리 정부에 찬 물을 끼얹는 발언이다.

지난 여름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은 우리 정부가 각별한 노력을 한 끝에 만들어낸 대화의 틀이다.

베이징 6자회담 결과 합의한 사항은 6자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은 핵문제를 고조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제1차 회담 이후 북한은 6자회담에 강한 불만을 표시해왔고, 제2차 6자회담에 불참하겠다면서 미국과 한국을 압박해 왔다.

통일부장관은 북측의 그런 언행 자체가 6자회담에 참여하겠다는 의사표시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즉 대미협상용이라는 것이다.

이번 핵 억지력 발언 역시 다음 날 북측대표가 남측대표에게 대미 협상용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야 말로 얘들 장난도 아니고 장관급회담의 존재 가치를 흔드는 언행이다.

그렇게 되면 문제의 외무성 발표가 무슨 협상 효과를 가져올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장관급회담에 나쁜 영향만 끼치고, 우리 국민이나 국제사회에 "북한은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나라"라는 인식밖에 얻은 게 없지 않은가.

이번 장관급회담에서 북한이 내세운 또하나의 요구는 남한내 반북단체들을 해산시키라는 것이다.

이는 실로 어처구니 없는 요구로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어거지에 불과하다.

북한이 무슨 권리로 남한의 민간단체를 해산해라 마라 할 수 있는가. 북한 당국은 남한체제를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런 반북단체들이 관제가 아닌 이상 어떻게 해산시킨다는 말인가. 도저히 불가능한 요구를 한 셈인데 이것은 북한이 다반사로 보이는 어거지 떼쓰기의 전형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지난 해 대선정국에 북핵사태가 불거진 이후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는 북핵문제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투입해야 할 정도로 북핵문제가 국정수행의 결정적 장애물로 작용해왔다.

한반도에 조성된 위기로 외자가 빠져나갔다.

경제불안을 가중시키는 데 한 몫을 한 것이다.

계속되고 있는 경기위축도 북핵과 무관하지 않다.

긴장국면의 한미관계를 풀어나가는 데도 북핵문제는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라크 파병 결정이 북핵문제를 푸는 데 이바지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 어려운 결단을 내린 결과 노 대통령은 그의 전통적 지지층을 잃는 정치적 타격을 받았다.

이렇듯 북한은 핵카드로 노무현 정부의 발목을 잡아왔으며 지금도 사정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문제는 대북 평화번영정책을 편 결과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한다는 국정과제가 북핵문제로 인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손해지만 북한측으로서는 더더욱 큰 손해라고 할 수 있다.

북핵문제가 없었다면 남북한 교류협력 사업들이 지금보다 한층 체계적이고도 속도감을 갖고 추진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것은 북한에 이득이 되는 일 아닌가.

북한이 핵카드를 사용해 우리 정부의 발목을 잡는다면 평화번영정책을 펴기가 점차 어려워진다.

남북 교류협력도 제대로 될 수 없다.

국민들의 대북인식도 점차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

국제사회의 인내심도 한계에 이를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과는 남북의 공존공영이 아니라 그 반대가 될 것이다.

북한 당국은 6자회담의 성격과 그것의 가치에 대해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북한은 지나칠 정도로 미국에 집착해 있는데, 6자회담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국가들의 향후 역할에 대해 따져보아야 한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시대 구상에 대해서도 연구해보고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되 북한이 최대의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방도를 구해야 할 것이다.

이수훈(경남대 북한대학원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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