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기타리스트 신중현은 4인조 록밴드 '애드포'를 결성한다.
대중음악이라면 트로트나 유명 팝송의 번안곡이 전부였던 당시 한국에 자생적인 록이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신중현은 단지 록을 한국에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록음악에 한국적 정서를 결합한 '한국적 록'을 만들어냈다.
시대를 앞서 나간 신중현의 음악은 한국 대중 음악의 뿌리가 되지만 암울했던 유신 체제 아래 그의 노래들은 금지곡 신세를 면치 못했고 그는 결국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한 순수한 대중 음악가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암울했던 당시의 시대 상황을 조명한다.
KBS 1TV '인물현대사'는 17일 밤 10시 '록의 이름으로-신중현'편을 방송한다.
'한국 록음악의 대부' 신중현은 본격적으로 서구 대중 음악을 수용해 우리의 감수성으로 소화한 첫 세대 대중 음악가로 꼽힌다.
한국 록음악사상 첫 번째 밴드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였다.
1962년 그는 한국 최초의 록그룹인 '애드포'를 결성하고, 1964년 최초의 록 음악작품으로 불리는 '빗속의 여인'을 발표한다.
당시 서구에서는 비틀즈, 롤링스톤즈와 같은 록그룹들이 막 등장해 인기를 모으는 중이었지만 한국음악계에선 그가 활동했던 미8군부대 내에서조차 생소할 정도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후 그는 한국의 가락과 록을 접목시켜 우리만의 정서와 보편적 감각을 두루 만족시키는 그 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구축한다.
그러나 막 꽃을 피우던 한국 록음악과 신중현은 유신정권하의 대중 문화 탄압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유신정권의 '긴급조치9호'와 함께 발표된 대중문화활동에 대한 정화방침은 유신체제가 지향하는 가치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대중 문화 활동들을 금지시켰다.
그의 노래 대부분은 '퇴폐','창법 저속','불신감 조장'등의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였고 '대마초 사건'의 연예계 공급책으로 지목되면서 강제로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장성현기자 jackso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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