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데스크-아웃플레이스먼트

입력 2003-10-10 11:42:38

후배 P는 지난 월급날에도 어김 없이 아내와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고 했다.

말이 전쟁이지 일방적으로 당한 모양이었다.

P 부부간 월례 전쟁은 통장에서 매달 자동이체돼 나가는 몇몇 보험료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듣고 보니 P가 걷는 고난의 길은 그만의 잘못 탓도 아니었다.

많은 직장 동료들을 거리로 내몰리게 했던 경제 위기, IMF 사태 이후 우리 삶의 상황이 원죄일 뿐이었다.

P에 따르면 그렇게 해서 발생한 실직자 중 상당수는 여러 형태의 외판원 등 직종으로 재출발했다.

또 옛 동료들을 찾아 다니며 "액수에는 상관 없으니 한 건만 거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P는 그 아픔을 함께 하겠다고, 또는 딱히 거절할 수 없어 여기저기 응했다.

하지만 남편 월급만으로 넉넉잖게 가계를 꾸려가야 하는 그의 아내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기도 했던 것이다.

최근 들어 P나 그의 동료와 같은 상황에 봉착하는 사람들이 또다시 늘 것이라는 불길한 징조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일시에 5천500명을 내보낸 KT를 시작으로 은행.증권 업계가 들썩거리고, 일반 기업체들도 오는 연말을 전후해 대규모 감원을 검토 중이라는 소문이 나돈다.

많은 노동자들이 IMF 사태 때에 맞먹을 정도의 감원 태풍에 떨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이같은 대규모 '명예퇴직'이 국내에서 처음 실시된 도시가 포항이다.

포스코가 1995년 1천412명을 일시에 조기 퇴직시킨 것이 시발이었다.

그때 포스코는 정년까지 남은 근무기간 등을 고려해 월급의 최대 90개월치를 위로금으로 얹어주면서 인력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계열사들의 동참 속에 이듬해까지 포스코 그룹을 떠난 사람은 총 2천500여명에 달했다

개인당 많게는 수억원까지 더 쥐어주며 퇴사시켰던 이 일은 당시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주목됐다.

평가도 오락가락했다.

정치권 등은 방만한 경영이라고 포스코를 질타했다.

하지만 머잖아 터진 IMF 사태는 이 일에 대한 평가를 뒤집어 '미래 경영의 대표적 모델'이라는 찬사를 쏟아놓게 했다.

덕분에 포스코는 다른 기업들의 벤치마킹 모델이 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기서 전례를 배운 수많은 기업들은 그 2년 뒤 IMF 사태가 터지자 명예퇴직이니 희망퇴직이니 하는 이름을 붙여 감원 대열을 이뤘다.

'형편 좋을 때 예상되는 위기에 대처한다'는 포스코의 본래 취지가 그 와중에서 변질돼 악용되기도 했다.

이제 다시 감원 태풍이 예고돼 있다.

'매미'급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그렇지만 밀려날 이들이 재취업할 가능성은 그렇게 높잖아 보인다

우선 일자리가 없다.

어떤 노동 전문가는 대기업 협력업체 외에는 대부분 기업이 이미 해외로 기지를 옮겨 가버렸다고 했다.

그런만큼 일자리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청년 실업이 넘쳐나는 상황은 이미 고착화돼 버렸다.

영업점들의 창구 젊은 여직원 대부분이 대졸이고 그나마 상당수가 계약직이라고 전하는 분도 있었다.

이건 분명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문제이고 더 심각하게 본다면 가장 기본되는 그 안위의 문제이기까지 하다.

정치권이 이합집산 하느니 어쩌니 소란을 피우고 있으나 우리의 상황은 그렇게 한가할 수 있는 단계를 벌써 넘어 버린 것이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일부 기업들이 직원들이 퇴직 이후에 대비할 수 있도록 전직지원(轉職支援) 프로그램(Outplacement)을 개설하고 있다.

고전적 의미의 아웃플레이스먼트는 구조조정 기업이 퇴직자의 새 출발을 지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년 퇴임 또는 자진 퇴사를 염두에 둔 사람들까지 대상으로 해 퇴사 일년 전쯤부터 재사회화(再社會化) 과정을 밟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들린다.

'조국 근대화의 역군'이라느니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의 주역'이라느니 하는 실속 없는 수사를 붙여 주며 노동자들을 휘몰아쳐 오던 우리 사회. 그 전초에 있는 기업들이 떠나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베풀수 있는 의리가 이 전직 지원이다.

이것만이라도 제대로 돼 월례 전쟁을 치르는 P와 같은 애꿎은 피해자를 다소나마 줄여 줄 수 있게 되기를 실낱같이 기대해 본다.

더욱이 우리나라도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어느덧 고령화 사회의 시대로 접어들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박종봉(동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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