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양돈농가, "남은건 빚 20억"

입력 2003-10-08 14:03:48

양돈업을 실패하고 홧병과 간질환으로 몸져누웠다는 손모(48.영천시 금호읍)씨의 양돈장은 금호읍내에서 차 한대가 겨우 다닐만한 비좁고 구불구불한 시멘트길을 따라 한참이나 달린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만난 양돈장 주인은 손씨가 아닌 조재학(34)씨.

한때 돼지 사육두수 2천마리가 넘었던 이 양돈장은 지금은 돼지 한 마리 없이 텅 비어있는 가운데 조씨가 양돈업을 재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씨는 "축협에서 지난 3월 부도로 파산한 손씨 양돈장을 경매에 부쳐 지난달 2억7천여만원에 낙찰받았다"며 "동업자인 박정영(34)씨와 이달말부터 양돈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영남대 축산학과 출신으로 4년전부터 양돈업에 뛰어든 조씨는 "경락자금과 양돈장 수리 및 어미돼지 입식비용은 축협에서 전액 대출받았다"고 말했다.

조씨는 "시작부터 수억원의 빚을 지고 가지만 열심히 노력해 생계비를 벌면서 빚을 최대한 줄여나가는 것이 목표"라면서도 "양돈업의 장래가 갈수록 비관적이어서 솔직히 겁이 난다"고 토로했다.

지역 양돈농가들이 위기에 몰려있다.

파산농가가 속출하고 500마리이상 사육하는 전업 양돈농가 대부분이 수억~수십억원의 빚구덩이에 빠져있다.

금호읍 황정리에서 돼지 5천마리를 사육, 사육규모가 영천에서 첫 손에 꼽히는 손갑석(60)씨는 30년 양돈에 종사해 지금까지 자식 길러낸 것을 빼고 남은 것이라고는 20억원이 넘는 부채뿐이다.

연간 실소득을 묻자 손씨는 대뜸 "적자지 뭐"라고 답한뒤 "사료값이 밀려 요즘 매달 2천만원씩 적자를 본다" 고 말했다.

손씨의 부인 김춘자(56)씨는 "결혼생활 30년동안 돼지똥만 치웠는데 남은 것은 빚 뿐"이라며 "왜 돼지농사만 우직스럽게 고집했는지 후회스럽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손씨는 "지금까지 돼지사육시설에만 20억원이 넘게 투자했는데 지금 손해본다고 당장 그만둘수도 없는 절박한 처지"라며 나아지겠거니 기대하며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지않느냐고 했다.

손씨의 양돈장 인근에는 팔려고 내놓은 양돈장들도 많지만 살 사람은 선뜻 나서지 않는다.

양돈경력 20년인 이광호(47.북안면 도천리)씨는 작년에 기르던 돼지 1천500마리를 몽땅 처분하고 6개월을 쉬었으나 다시 돼지사육에 나서기로 했다.

이씨는 8년전 시설자금 2억1천만원과 자비 1억원 등을 투자했다.

그러나 97년말 IMF 이후 사료값 등 생산단가는 2배 이상 급등했으나 돼지값은 오히려 떨어졌다.

당연히 매년 6천만원씩 적자를 보다가 작년 태풍 '루사'로 돈사가 침수돼 아예 양돈업을 걷어치웠다.

그러나 양돈업을 그만두면 융자받은 시설자금을 일시불로 갚아야하고 다른 부채 이자도 눈덩이처럼 늘어나 감당할수 없게돼 이씨는 어쩔 수 없이 돼지사육을 재개해야할 처지다.

양돈농들이 이처럼 파산위기에 놓인 것은 생산비(100~110kg 규격돈 한마리당 17만원)는 크게 올랐지만 돼지값은 계속 하락세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2000년 3월 이후 잇따른 구제역과 돼지콜레라 파동으로 수출길이 끊겼고 규격돈 돼지 한마리값이 3년전 18만원에서 현재 13만원으로 떨어져 양돈농들의 목줄을 죄고있다.

또 농가당 수억원씩 융자받은 시설자금을 갚지못하면서 연리 5~9%인 시설자금 연체이자가 양돈농들의 발목을 잡고있다.

돼지 1천700마리 사육에 농가부채 5억원이라는 양돈농 성동원(44.금호읍 관정리)씨는 "89년 돼지고기 1근값이 5천500원이었으나 지금은 5천100원으로 도로 낮아졌다"며 "돼지사육은 더이상 희망이 보이지않는다"고 한탄했다.

성씨는 "국내 소비자들이 돼지 삼겹살만 찾자 제일제당, 대상, 대한사료 등 사료제조업체들이 미국, 캐나다, 유럽에서 앞다퉈 삼겹살을 수입하고 있다"며 "특히 농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농.축협 까지 삼겹살수입에 나서고 있으니 농민은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양돈농가들에 따르면 영천에서만 현재 10여 농가가 100억원이 넘는 부채를 갚지못해 파산했고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연말에 파산농가가 속출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영천의 양돈농가 80% 이상이 파산위기에 직면했다는 위기설도 나오고 있다.

영천축협 채권담당 정동칠(52)씨는 "부채로 축협의 경매건수가 매년 10건이 넘는다"며 "시설자금 이자와 사료대금 부채가 농가파산의 주원인"이라고 말했다.

금호읍 황정리 양돈장을 나오는 길. 두 농민의 대화가 양돈농의 현실을 그대로 대변해준다.

"형님, 어제 밤 경산에서 양돈농민 두명이 부도를 내고 야반도주했다캅니더" "요즘 양돈하는 사람치고 그런 마음 먹어보지 않은 사람 어디있겠나, 이사람아".

영천.서종일기자 jiseo@imaeil.com

사진:부도로 파산하고 텅 비어있는 영천시 금호읍 황정리의 한 양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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