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경전인 시경(詩經)은 고대 중국 주나라 때의 노래를 모은 것이다.
주나라가 전국을 통일하자 여러 부족들이 왕도로 찾아와 자신들의 가무로 주나라 조정의 환심을 사려했다.
뒤에 그 가사들이 공자의 손에 들어가 공자학원의 교과서가 됐다.
시경 서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위(上)는 바람으로써 아래를 화(化)하며, 아래는 바람(風)으로써 위를 찌른다(刺). 말하는 사람은 죄가 없으며, 이를 듣는 사람은 그것으로 계율을 삼기에 족하다".
여기서의 바람은 위정자의 덕이 되기도 하고, 세간에 흐르는 민심이 되기도 한다.
바람 풍(風)과 욀 풍(諷)은 같은 계통의 한자다.
'칼로 찌르는 바람 속의 말'이 곧 풍자(諷刺)다.
그 어원의 의미심장함에 눈이 간다.
'말하는 사람에게 죄가 없다'는 서문의 경구는 인간의 언론욕구가 천부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또 '이를 듣는 사람 즉 위정자는 그것으로 계율을 삼기에 족하다'는 지적은 동서고금 정치철학의 기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에겐 죄가 없다"
동아일보가 대통령 부인의 아파트 전매사실을 '악의적으로' 보도했다 하여 청와대 홍보수석실로부터 취재거부를 당하고 있다.
청와대는 '저주'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동아일보를 비난했다고 한다.
사태의 전말을 세세히는 모르겠으나 청와대가 감정에 치우쳐 눈이 어두워진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악의적으로'라는 말은 청와대의 주관적 판단일 뿐이다.
이 말을 쓰려면 몇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허위사실을 유포했거나, 과장.왜곡이거나, 공연히 시비를 거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런 조건에 부합되는 이야기들이 제시되지 않는다.
한 나라 최고의 지성과 문장들이 모인 청와대에서 '저주'라는 극단의 주관적 표현을 했다는 것도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왕조시대의 무당들이나 쓸 수 있는 단어가 어떻게 나라의 대강을 정하는 청와대에서 흘러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청와대 정도의 대응이라면 근거와 이론으로 상대의 '악의'를 증명하고, '저주'의 배경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형편이 못되면 과오를 솔직히 시인하거나, 노 코멘트 하는 게 맞다.
섣부른 언론 대응으로 청와대 홍보수석실이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동안 노무현 대통령은 태풍 매미 내습 때의 연극 관람으로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내무공무원들에게 비상근무를 시켜놓고 연극을 관람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적절치 않은 처신이다.
"문서와 전화로 챙기고 있었다"는 변명을 해도 여론이 가라앉지 않자 뒤늦게 대통령이 '국민에게 송구하다'는 대통령 사과를 냈다.
청와대의 순발력이 너무 옹색하다.
노 대통령이 수재에 무심했다는 것은 사후활동에서도 읽혀진다.
한 차례 수해현장을 다녀온 듯 보이나 국가재난을 적극적으로 극복해보겠다는 의지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가슴 찢어진 수재민들을 다독이는데도 무심했다.
재난의 많은 부분이 인재에 해당하는 사안이었던 만큼 미온 대처한 스스로의 허물을 반성하고, 공직사회의 무사안일을 질타하는 언급이 있어야 했다.
이 두 가지 사례를 보면 우리나라 국정의 중심인 청와대가 뭔가 비뚤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우리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청년실업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노심초사가 전달돼야 한다.
집집이 겪고 있는 실의와 암담을 희망으로 바꿔줄 격려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노심초사와 격려의 사연들이 언론과의 말싸움에 파묻혀 버리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대통령을 선택하는 낙후된 정치 시스템의 문제는 아닐까. 임기를 마치는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애국심과 자질을 갖춘 후임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의 전체 치적과 맞먹는 중요한 정치행위다.
지도자 선택 시스템의 낙후성
그러나 우리 형편은 그러하지가 못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논외로 하면 후임 대통령 선출은 실패작이 많았던 듯하다.
전두환 정권이 선택한 노태우 정권은 무책임하고 파렴치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 뒤를 이은 김영삼 정권은 오기만 앞세웠지, 통치력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어부지리로 정권을 획득한 김대중 정권은 패거리 정치를 함으로써 불행한 막을 내렸다.
IMF사태를 극복한 공로가 없지 않으나 그 처리과정에 기생한 부패의 부작용은 국가의 짐이 되고 있다.
김대중 정권이 탄생시킨 노무현 정권은 출범 내내 집권능력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전임 대통령들이 애국애족을 앞세우기 보다 퇴임 이후의 보신을 위해 정권을 선택한 경우가 특히 문제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자신도 보호받지 못하고, 나라만 어지럽도록 만든 게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런 후진적 고리를 끊지 못하면 다음 대통령에게서도 바람 속의 애민의식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박진용(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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