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 저 멀리 가야산(1천433m)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늘신과 산신이 감응해 대가야의 초대 이진아시(뇌질주일)왕을 낳았다는 어머니의 산이다.
가야산의 지맥은 동쪽으로 겹겹이 산봉우리를 수놓았고 경북 고령읍에 이르러 주산(321m)으로 우뚝 섰다.
주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동쪽 구릉에는 옛 대가야 궁성터와 고령읍이 자리잡았다.
가야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가천(대가천+소가천)과 야천(안림천)은 읍내를 반대편에서 감싸안으며 회천에서 서로 만나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대구에서 고령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금산(망산;286m)이 회천과 고령읍을 사이에 두고 주산과 마주보고 있었다.
가야산 여신이 그렇게 갈망하던 백성들의 풍요로운 보금자리였다.
그리고 그 주산 능선을 따라 산봉우리처럼 솟은 무덤들. 1천600여년을 그렇게 말없이 지켜온 수백, 수천의 영혼들. 아! 지산동 고분군.
대가야 왕릉전시관을 비껴 지산리 주산 능선에 올랐다.
중턱에서 가야산으로 눈길을 돌리니 마치 산신 정견모주가 왕들의 무덤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영욕의 역사와 함께 한 무덤이자,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배인 무덤. 대가야 왕들은 그렇게 높은 곳에 누워 읍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산 정상 주변에 두겹의 테를 두른 산성이 옛 궁성과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이형기 전 고령군 학예연구사는 "대가야의 지배층 무덤은 대체로 산 능선 위에 있다"며 "평지에서 보이도록 함으로써 그 위세를 드러내고 후손들을 보살필 수 있다는 대가야인들의 인식이 투영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뻗은 주능선에 장관을 이루고 있는 왕과 왕족의 무덤. 이 능선은 읍내를 휘감아 고아리 산기슭 벽화고분에까지 뻗어갔다.
그러나 일제가 도로 개통을 명목으로 능선 허리를 잘라 웅장한 고분군에 흠집을 남겨 놓았다.
흙을 쌓은 형태가 남아 있는 무덤(封土墳) 약 200기를 비롯해 주능선 동쪽 가지능선의 소형 무덤까지 포함하면 2천여기에 달했다.
큰 무덤은 바닥 지름이 무려 20m를 넘었다.
금관가야 김해, 아라가야 함안, 소가야 고성, 비화가야 창녕 등지에도 지배층 무덤이 있지만 그 규모와 수, 유물의 양과 질에서 지산동 고분에 견줄 만한 데는 없다.
왕릉전시관 뒤편 주능선 구릉지대에 옹기종기 모인 32~35호분. 78년 발굴작업을 하던 계명대박물관이 비상한 관심을 모은 것은 특이한 무덤 구조였다.
32호와 33호는 아래위가 아닌 동서로 나란히 배치됐고, 34호와 35호는 바닥을 감싼 둘레돌(護石)과 쌓은 흙(封土)이 서로 연결돼 있었다.
34호는 껴묻이 돌널(殉葬石槨) 1기를 품에 안은 남성 무덤, 여기 연결된 35호는 여성 무덤으로 추정됐다.
왕과 왕비가 묻힌 쌍묘(雙墳)였던 것. 금동관, 갑옷과 투구, 큰 칼이 나온 32호와 귀걸이, 옥류가 나온 33호도 유물과 무덤 배열로 봐 부부묘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32호 인근 32NE-1호분에서 나온 은상감된 고리자루 큰 칼은 수준높은 대가야의 제철기술을 뽐냈다.
김세기 대구한의대(역사관광학) 교수는 "대가야가 날개를 펴기 시작한 400년대 초엽에 35호분, 뒤이어 나머지 3기가 축조됐다"며 "껴묻이 널과 중형 무덤을 쌓은 '고총고분기'로, 국명도 '반로'에서 '가라'로 공식화한 시점"이라고 했다.
왕릉전시관 바로 옆 30호분. 껴묻이 널의 금동관과 주인돌방(主石室)의 덮개 돌(蓋石)이 발굴자들의 눈을 번뜩이게 했다.
껴묻이 돌널이 주인돌방 바로 밑에서 발견된데다 그 속에서 3~11세 유아의 머리뼈와 금동관이 나왔던 것. 왕이 죽던 해에 그 자녀가 질병 등으로 인해 죽음으로써 껴묻힌 것으로 보였다.
바위그림(岩刻畵)을 깨 사용한 주인돌방의 덮개 돌도 눈길을 끌었다.
암각화의 파괴는 당시 사상, 신앙의 파괴를 뜻할 수 있기 때문. 400년대 중엽, 가라국이 세를 넓혀나가던 시점의 무덤이었다.
44, 45, 47호분은 가라국이 중국과 왜에 사신을 보내거나 교역을 하며 왕성한 활동을 펴던 시기를 반영했다.
당시 왕의 죽음은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고 지배체제를 굳히는 계기가 됐다.
시신을 가매장한 뒤 묘터를 조성해 본매장을 하기까지는 수십, 수백명의 인력과 수개월의 기간이 걸렸다.
고구려, 백제처럼 3년상을 치렀다는 것. 껴묻이 대상자를 정한 뒤 땅을 파서 다지고, 돌로 바닥과 벽면, 덮개 등 널을 만들고 흙으로 봉분을 쌓기 위해 전문기술자와 주술사도 투입했다.
대규모 토목사업과 장례의식을 벌임으로써 강력한 권위를 과시했던 것. 44, 45호분에서는 각각 32기와 11기의 껴묻이 널과 칼, 말장구, 금 귀걸이 등이 쏟아져 그 위세를 실감케했다.
특히 일본 오키나와산 야광조개국자, 중국 또는 백제계 등잔과 청동그릇, 은장식 창 등은 활발한 국제교류를 방증했다.
이 두 무덤의 주인공이 바로 중국에 사신을 보낸 '하지왕'이나 가야금을 만들게 한 '가실왕'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 '현의 서쪽 2리쯤 되는 곳에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함께 군민들에게 '금림왕릉'으로 전해진 47호분. 지산동 고분중 최대 규모다.
일제 때(1939년) 부분 발굴에서 칼, 금귀거리, 은팔찌, 금동화살통 장식이 나왔다.
바야흐로 '대가야'를 공식 표방하며 국제무대에 등장, 세력권을 최대로 넓히며 전성기를 누렸던 400년대 후반~500년대 중반 왕들의 무덤이었다.
지금까지 중.대형 무덤 8기와 주변만 발굴했지만 이 지산동 고분군이 가야시대 최고 위계의 무덤이라는데 학계의 이견이 없다.
향후 추가 발굴로 베일은 더 벗겨질 전망이다.
묻혀진 대가야의 역사를 되살리고 있는 영원한 지산동 고분이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기자(고령)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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