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배운다-경주 반월성 주변 유적지

입력 2003-08-29 08:51:19

요즘 세계문화엑스포가 열리는 경주엔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대개 엑스포를 관람하고 주변 신라 유적지도 돌아보게 마련이다.

이 때 유명 유적지를 중심으로 관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한편으론 유명세에 밀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유적지에도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만일 경주를 자주 찾아 유명 유적지를 많이 둘러보았다면 평소 잘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중요한 유적지를 짬 내어서 찾아보자. 옛 경주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반월성 주변으로 대표적인 몇 곳을 소개한다.

◇일정교(日精橋)

경주 박물관 남쪽 아래로 흐르는 남천에서 발굴된 다리 유적지이다.

지난 2001년 1월에 발굴돼 그동안 수차례의 조사를 거친 후 올해 4월에 발굴이 마무리됐다.

다리의 재질은 전부 화강암이다.

길이 63m, 폭 9m, 교각 3개로 신라에서 만든 다리 중에서는 최대 크기이다.

지금은 남천 강바닥에 길이 14m, 너비 3.7m의 교각 2개만 남아 당시 다리의 규모를 짐작할 뿐이다.

경주시 문화예술과 이채경 학예연구사는 "신라 때 이 다리를 연결하는 도로는 폭이 24m 대로로 당시 80만~100여만 명인 경주 인구 규모에 걸맞는 유적"이라고 한다.

경주박물관에 모형 전시물이 있어 다리의 모양과 위치, 도로의 크기 등을 엿볼 수 있다.

모형 전시관 앞엔 98년에 발굴된 도로 현장과 수레바퀴 자국 등을 원형 그대로 보존해서 사실감을 높여주고 있다

이 다리는 칠성교 혹은 효불효교라고도 한다.

효불효교는 옛날 남천 아래에 사는 과부가 남천 너머의 홀아비를 만나러 돌다리를 건너던 것을 안 과부의 자식들이 다리를 놓아 어머니에겐 효가 되었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에겐 불효를 했다는데서 이름 지어졌다.

칠성교라는 이름은 선조들이 북두칠성이 생긴 유래를 효불효교의 전설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 부른 듯하다.

◇월정교(月精橋)

월정교는 일정교에서 서쪽으로 1km 남짓 아래에 있는 다리 유적지로 일정교보다 훨씬 이전인 1984년에 발굴된 곳이다.

일정교보다 보존이 잘 된 편이지만 이 다리를 보기 위해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곳은 길이 14m, 폭4m 가량으로 발굴 당시 4개의 교각이 있었으나 지금은 1개로 복원돼 있다.

다리의 모양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김극기라는 시인이 '무지개 다리'라고 하였으며, 남천엔 이무기가 살 정도로 물이 깊었다는 노래 속에 월정교가 아치형의 무지개 모양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월정교는 일정교와 달리 유실 연대가 비교적 분명하다.

'동경잡기'에 고려 충렬왕 6년(1280년)에 경주 부유수 노경론이 중수한 기록이 있고, 이후 조선 중종 25년(1530년) '동국여지승람'에 다리 기능을 잃어버리고 흔적만 남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500~600년간은 다리로 이용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향교

월정교 주변에 있다.

이 신라 향교를 무대로 원효, 요석공주, 무열왕, 설총이 등장한다.

월정교 옆에는 발굴 당시 나무로 된 목교가 있었는데(월정교 아래 30m 지점에 교각이 모두 12개 규모로 발굴되었으나 조사 후 모두 땅속에 묻혀 지금은 흔적도 없다), 이 다리에서 원효는 무열왕이 보낸 군사와 맞닥뜨려 일부러 물에 빠진 후 지금의 신라 향교인 요석공주의 거처(요석궁)에서 사흘밤을 머물다가 훗날 신라의 대학자인 설총을 낳았다.

이후 요석공주가 기거하던 요석궁은 훗날 설총에 의해 지금의 국립대학교와 같은 국학으로 발전했고 이후 고려시대 국자감, 조선 시대의 향교로 변화했다.

신라 향교가 요석궁이었다는 사실은 실제 향교 안내판에도 없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신라 향교엔 앞쪽으로 중국의 공자와 그 제자를 모신 대성전이 있고 뒤편에 동모, 서모, 명륜당이 있다.

요즘으로 치면 학생들의 기숙사, 교수 연구실, 강의실 등을 흥미롭게 구경할 수 있다.

◇교동 최부자 고택

신라 향교 주변, 반월성 남쪽에 있는 교동의 최부자 고택은 교동 법주로도 유명하다.

'12대 만석꾼에 9대 진사'라는 유명세와 함께 조선시대의 양반가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지금은 사랑채가 없어졌고 바깥채와 안채, 그리고 벼 육천 섬을 넣어두었다는 곳간 한 곳이 남아 있다.

최부자가 12대에 걸쳐 만석꾼을 유지하게 된 가훈이 더 흥미롭다.

대대로 내려오는 가훈은 모두 6가지인데, 첫째가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와 권력을 동시에 쥐기는 힘들다는 지혜가 반영된 것이다.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 것. 부자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최부자들은 절제의 미덕을 실천한 듯 하다.

셋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에는 재산을 늘리지 말라. 다섯째, 최씨 가문에 시집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는다.

마지막 여섯 째는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요즘으로 말하자면 부의 사회 환원으로 이해된다.

김경호(체험교육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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