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쓰레기의 높이와 문화의 깊이

입력 2003-08-13 14:01:44

인생은 완벽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고 불평하면서 살기에는 너무 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얼마 전 고인이 된 고 정몽헌 회장은 선뜻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추측컨대, 그는 불만스런 삶이 너무 길고 지루해 피곤한 다리로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지 않았을까?

역사는 대개 완벽한 삶을 사는데 성공하거나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완벽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수는 처음부터 많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요즈음에는 밤낮으로 대나무 잎사귀만 먹고 사는 팬더만큼이나 희귀하고 숫자가 줄어들었다.

반면에 불경기에도 명품을 사기 위해 돈을 벌거나 빚을 지는 구경꾼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한번도 자신을 명품으로 만들 생각은 해보지도 못한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여의치 않은 자들은 하루하루가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는 중환자처럼 괴롭기만 하다.

카드 빚을 진 자들은 가만있어도 짐승처럼 쫓기는 기분이다.

최근 EBS가 조선 초기 청백리로 유명한 황희 정승을 소개하고 있지만, 모르면 몰라도 우리의 젊은이들은 그런 삶에 감명보다는 충격을 느낄는지 모른다.

영의정이 꽁보리밥에 반찬 두 가지로 식사하는 것을 믿으란 말인가? 그리고 그것은 과연 올바른 삶의 방식일까?

정신적인 공백을 물질로나마 채워 보려는 심리를 누구보다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 기업이다.

기업은 대중들의 취약한 가치관을 파고들어 물질세계의 아름다움을 전도한다.

물질은 영원하지는 않지만 아름답다고 말한다.

인생은 앞으로 달리는 신나는 회전목마라고 선전한다.

그래서 백화점은 항상 백화가 만발한 낙원으로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춘향이 그네 타는 기분이고 양 손에 가득한 보따리는 한두 시간 천국을 맛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것마저 시들해 지면, 몸에 걸치는 것이 더 이상 흥분과 자극을 일으키지 못하면 인간은 어느새 몸으로 돌아가 새로운 몸을 갈구하게 된다.

그래서 성형도 해보고, 파트너도 바꾸면서 마치 시인 노발리스처럼 외친다: "인간의 육체에 손을 얹어놓는 순간 느껴지는 천국이여". 대중문화란 이렇게 호텔 수영장을 마치 명사십리 해수욕장인양 착각하며 허공에 튀기는 물방울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마저 여의치 않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미국 시인인 앨런 긴스버그의 방법도 있을 것이다.

"나는 거울 속의 나와 사랑을 나누었다.

나의 입술에 키스를 하면서. 그리고 속삭이기를,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한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너를'". 남과의 사랑이 불가능하면 자신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고독한 지식인이나 예술가의 삶이 대개 이런 부류에 속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실패가 누군가에 의해 사랑을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자신만은 자신으로부터 빼앗기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럼 누가 이들로부터 사랑을 빼앗았단 말인가? 고독한 현대인의 배후에는 현란한 백화점이 있고 네온사인이 벌겋게 달아오른 극장과 호텔과 주점이 있다.

그러나 좀더 골목길을 더듬어 내려가면 헝클어 질대로 헝클어진 현대인의 가치관이 있고, 허물어지고 비뚤어진 교육이 이를 부추기고 있으며, 이런 문화를 이용해 부와 물질을 추구하는 기업이 있고, 이런 활동을 정당화시켜주는 법과 제도가 있다.

그래서 무엇이 합법이고 불법이며 무엇이 도덕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인지 그 경계가 실로 애매해 칼로 안개를 베는 것 같게 되니, 그 누가 황희와 같은 청백리가 되기를 꿈꾸겠는가? 한때 황희를 꿈꾸었던 수많은 인재들이 하룻밤 나이트클럽에서 짧은 정치 생명을 요란하게 마감하지 않겠는가?

아놀드의 시 '에트나에서의 엠페도클레스'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앞둔 주인공은 탄식 한다.

"고고한 것들은 모두 쓰러져버리고, 하찮은 것들은 한데 뭉쳐 맞설 자가 없게 되었구나". 그러면 에즈라 파운드처럼 분연히 일어서야 하지 않을까. "내 지식인으로서 이 나라의 문학이 썩어가는 것을 어찌 모른 채 앉아만 있을 수 있으랴! 훌륭한 글들이 무시당하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으랴!". 아니면 예이츠처럼 "대중문학만 있고 소수를 위한 문학은 없다"고 투덜대는 것으로 끝내고 말까? 대중 속의 귀양살이, 고향 속의 타향살이, 외로운 소수가 갈 곳은 어디인가? 오늘도 산과 들에는 먹고 버린 쓰레기가 얼마나 쌓였을까? 아 쓰레기의 높이와 문화의 깊이여!

최병현(호남대 교수·영어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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