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爐)에서 뿜어져 나온 열기가 안면 근육을 후끈 달궜다.
시뻘건 불길 속에는 숯과 개탄, 철이 한 몸으로 뒹굴었다.
칼과 낫으로, 괭이로 거듭나려는 '산고(産苦)의 몸부림'이었다.
숱한 세월을 견뎌낼 쇠를 만들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게 한 이 제철로. 대장장이의 굵은 팔뚝과 부라린 눈, 쇳덩이에서 튀겨 나오는 불꽃은 그야말로 '힘' 그 자체였다.
1천700여년 전 대가야의 철제 무기와 농기구도 이렇게 만들어졌다.
경북 고령군 읍내 시장 한복판, 고령 유일의 대장간. 간판도 없는 이 곳에는 2대째 이어온 대장장이 이상철(59)씨가 연신 쇠를 두드리고 있었다.
마침 '5일장' 장날, 주문량이 많아 쏟아지는 땀을 훔칠 겨를도 없었다.
"'배운게 도둑질'이라 40년 넘게 쇠만 때리고 있죠. 그래도 이 일 안했으면 어디가 아파도 아팠을 겁니다". 경남 합천군 봉산면에서 난 이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의 대장간 일을 거들었다.
곁눈질로 익힌 기술은 결국 '도둑질'이 돼 벌써 45년째로 접어들었다.
고령에 대장간이 4군데나 있던 10년 전까지만 해도 장날 외에는 시골 곳곳을 다니며 연장을 손볼 정도로 찾는 사람들이 많았단다.
그래도 가끔 경남 거창, 함양의 농사꾼들까지 이씨의 '낫 기술'을 알고 찾아올 때면 후끈거리는 대장간 열기도 정겹기만 하다.
땀이 흥건히 배인 그의 팔뚝에는 시퍼런 힘줄이 불거져 나왔다.
대가야의 제철 후예는 그렇게 살아 있었다
내친김에 대가야 철의 본산이자 이씨의 고향이기도 한 합천으로 내달렸다.
88고속도로 해인사 나들목을 빠져나와 약 2㎞쯤 달린 야로면 야로2리 '돈평'마을. '노에서 쇠를 불린다'는 뜻의 '야로(冶爐)'. 이름도 그럴 듯했다.
이 동네 뒤편 산속 '불묏골'로 20분쯤 오르자 쇠똥(슬래그)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점토, 참숯, 토기조각 등도 보였다.
동행한 신종환 대가야박물관장이 갑자기 눈을 번쩍였다.
'노벽(爐壁)'을 발견한 것이다.
신 관장은 "노벽이 이중으로 겹친 것으로 봐 쇠를 빼낸 뒤 완전 부수고 다시 쌓는 등 2개의 노를 축조했던 것"이라며 "가로 4m, 세로 1.5m의 장방형 조선시대 제철로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토기조각 등으로 볼 때 대가야때도 제철로와 철광산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며 "대가야사를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라고 했다.
이에 앞서 경남발전연구원은 '야로 야철지 지표조사 보고서'를 통해 '최소 2개 이상의 노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노벽 주변에서 옹기, 백자, 토기 조각 등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연구원은 또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장기간에 걸쳐 제철과 관련된 작업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빠른 시일안에 발굴조사를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천년을 훌쩍 넘긴 시·공간이지만 희미하게나마 그 때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동네 정덕수(61)씨는 한가지 흥미로운 얘기를 꺼냈다.
물론 옛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다.
인접한 금평1리 '금평(金平)'마을에서 쇠(金)를 캐내 야로2리 '불묏골'에서 쇠를 불린 뒤 금평2리 '창동(倉洞)'마을 창고에 불린 쇠를 보관했다는 것. 철기의 생산, 보관과정이 동네 이름에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조선시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야로현은 철이 많이 생산돼 일년에 세공으로 정철 9천500근을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간 철 5~6t을 세금으로 낸 셈이다.
그 철은 바로 이 '금평', '돈평'마을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지금의 합천군 야로면과 가야면 일대를 아우른 야로현은 고려말 이전까지 고령군에 속한 현이었다.
통일신라때까지는 '적화현(赤火縣)'으로 불렸다.
'붉은 불'이란 뜻에서도 철과 제련을 연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미숭산(734m)을 중심으로 한 야로면 '돈평' '금평'마을외에도 인접한 가야면 성기리 '야동(冶洞)'마을 뒷산, 쌍림면 용1리 '불묏골', 쌍림면 산주리 등에도 쇠똥 등이 나와 당시 야철지였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있다.
한반도에 철기가 도입된 시기는 기원전 200~100년대. 중국 전국시대 철기가 금강유역을 포함한 한반도 북부지역에 들어왔다.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에는 다소 늦은 기원전 100년 이후 무렵, 중국을 통해 철기가 본격 유입됐다.
특히 삼한시대 진·변한의 제철기술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 위만조선의 영향이 컸다
위만조선이 중국 한나라에 망하면서 당시 제철 기술자들이 남쪽으로 내려왔다는 것.
가야천과 회천이 적셔놓은 땅을 발판으로 300년대 변한 소국(반로국)에서 가라국으로 거듭난 대가야. 풍부한 농업생산력을 기반한 대가야는 이전 맹주국이던 김해세력과 긴밀한 관계속에 제철기술을 도입했다.
300년대 말~400년대 초 축조된 고령 쾌빈동 1호 고분. 이 나무널무덤에서는 창, 화살촉, 칼 등 다양한 철기류 32점이 나왔다.
300년대부터 이미 대가야의 철 생산이 이뤄졌다는 것을 시사하는 유물이다.
도끼, 낫, 쇠스랑 등 철제 농기구는 농업생산력을 크게 높였다.
여기다 북동쪽의 신라를 견제하며 서남쪽으로 향하던 중 야로 철산지까지 확보하게 된다.
서쪽으로, 남쪽으로 힘차게 달리던 말이 '날개'까지 단 셈이었다.
이후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는 고리자루 큰 칼, 갑옷, 투구 등 힘과 위세를 나타내는 철제 유물이 쏟아졌다.
전쟁을 통한 정복의 역사를 말하고 있었다.
손명조 공주박물관장은 "가야시대 힘의 관건은 제철 기술력과 철산지, 철 교역권의 확보 여부였다"며 "초기에는 김해 구야국이 이를 확보했으나 400년부터 대가야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다라국 지배층 무덤인 경남 합천군 쌍책면 옥전고분군. 300년대 전반 무덤에서는 철기가 일부 출토되다 400년대부터는 수십점씩 무더기로 나왔다.
특히 M3호 돌널무덤에서는 다량의 철기와 함께 망치, 집게, 숫돌 등 철 재료를 불에 달군 뒤 두드려 가공할 때 쓰는 기구(鍛冶具)들이 나와 철기 제작집단이 그곳에 있었다는 점을 방증하고 있다.
이처럼 대가야는 미숭산 주변의 야철지, 다라국(합천)의 철기 제작집단을 기반으로 철 교역권을 움켜 쥐고 주변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경제력, 무력, 농업생산력을 동시에 확보함으로써 황강·남강을 거슬러 경남 고성까지, 백두대간을 넘어 전북 남원·장수·진안까지, 섬진강을 타고 전남 여수까지 세를 뻗쳤다.
오늘날 핵무기나 초장거리 미사일에 견줄만한 '철의 힘'이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김인탁기자 kit@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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