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중고 섬유, 불황을 뚫는다-제직업계 2)베끼기 악습

입력 2003-08-05 09:22:47

"베끼기 문화를 뿌리뽑지 못하는 한 대구 제직산업의 활로를 논할 수 없습니다".

사상 유례없는 대불황속에서도 활로 찾기에 안간힘을 쏟고 있는 지역 제직업체들은 대구 제직산업이 살아남으려면 베끼기 문화부터 뿌리뽑아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업체들에 따르면 지역의 경우 한 디자인이 10~20년간 장수하는 이탈리아, 미국, 일본 등 섬유 선진국과 달리 아무리 뛰어난 신제품을 개발해도 채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일반 범용성 제품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신제품을 보호하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전무해 좀 잘 된다 싶으면 중소섬유업체들은 물론 대기업까지 무더기로 달려들어 제품경쟁력 약화 및 가격 하락이 불가피하다는 것.

업체들은 이 같은 카피문화의 범람이 지역 제직산업의 구조고도화는 물론 업체들의 신기술.신제품 개발 노력까지 가로막고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으로 지적보호협의체 구성 및 업체간 자율 조정 작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실태

한국섬유개발연구원(섬개연)이 최근 대구지역 직물수출 100대 기업과 섬개연 정보회원업체 40개 등 140개 업체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89.2%가 자사제품이 타업체에 의해 불법복제된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신상품 생산에서 불법복제까지 걸리는 시간은 1개월 이내가 23.7%, 2개월과 3개월 이내가 각각 28.9%로 조사됐고, 정품에 비해 복제품의 가격이 20% 가량 하락한다는 대답이 33.3%, 30% 이상 하락한다는 응답이 30.6%로 각각 나타났다.

업체들에 따르면 이같은 카피 문화는 장기 불황이 심화되고 있는 올해 들어 더욱 가속화하고 있는 추세다.

서대구공단 ㅎ섬유 박모 사장은 신규 바이어와의 구두계약에 성공해도 결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장기 불황으로 최소한의 상도의마저 무너졌다고 한탄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계약 성사 단계에서 다른 업체들이 너도 나도 끼어들어 똑같은 물건을 80~90% 값으로 낮춰 바이어를 가로채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ㄷ섬유 장모 사장은 업체간 제살깎기 경쟁을 의도적으로 악용하는 바이어들도 많다고 했다.

지역 사정에 정통한 바이어 경우 한 업체에서 야드당 1천원대의 원단을 구두계약했다 다른 업체들을 찾아다니며 900원, 800원, 700원으로 가격을 낮춰 실계약하는 일이 잦다는 것.

◇베끼기 관행이 구조고도화 막는다

업체들은 카피문화를 뿌리 뽑지 못하면 대구 섬유 구조고도화도 헛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대구 제직산업이 살아남으려면 중국과의 가격경쟁력에 뒤지는 일반 범용성 제품 대신 다품종 소롯트의 고부가 가치제품 생산으로 차츰 전환해야 하지만 베끼기 문화가 만연하고 있는 현 시스템상으로는 이같은 체제 전환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

ㅍ섬유 윤모 대표는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전환한 업체들 중 상당수가 카피문화에 의한 가격 경쟁력 상실로 도산했다"고 했다.

특정 품목이 잘 팔리면 너도나도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고 이는 공급과잉으로 이어져 결국 제값을 받을 수 없게 됐다는 것.

한국섬유개발연구원 관계자는 밀라노프로젝트 주관기관의 신제품 개발 사업도 업체들의 불법 복제 관행을 막지 못하는 한 실효를 거둘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신제품 개발 과정시 제품의 지적 재산권 보호를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전무해 업체들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뿌리깊은 카피 문화가 섬유산업 고도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베끼기 문화를 뿌리뽑을 수 있는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한 업체와 연구기관의 공동 신제품 개발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책

지역 제직업계는 베끼기 관행을 뿌리뽑기 위한 근본적 대책으로 지적보호협의체 구성을 제시하고 있다.

대구.경북 견직물조합이 중심이 돼 협의체를 구성하고 개별 업체의 신제품 발표에 이은 심사단 평가 및 이의 신청 기간을 거쳐 특정 제품에 대한 공식 인증 작업을 실시하자는 것이다.

업계는 이같은 협의체 구성을 통해 지역 제직업체가 특화된 신제품 위주 생산 그룹과 일반 범용성 생산 그룹으로 다원화돼야 지역 제직산업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업계는 이를 위해 전문소위원회 등을 설립, 자구방안을 마련하는 한편 협의체의 운영, 권한, 지위 등에 대한 사전논의 과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업계 자율 조정 노력이다.

ㄱ산업자재 문모 대표는 "이탈리아 비엘라 경우 수천개의 섬유 기업들이 밀집해 있지만 업체간 협의하에 제품 생산량을 조절하고 있다"고 했다.

특정 품목이 아무리 잘 팔린다고 해도 다른 업체들은 해당 업체의 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 추가 생산을 자제한다는 것이다.

문 대표는 "서울 등 경기 지역만 해도 산업용섬유 협의체가 조직돼 특정 품목의 과잉 생산을 막고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는다"며 "대구지역 섬유업체들도 이같은 상호 협력체제 구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상준기자 all4you@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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