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종국 교수가 본 대가야의 국명 변화

입력 2003-08-04 09:12:34

◇노중국 계명대 교수

국명은 한 정치체의 독자성과 독립성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가야사는 일국의 역사가 아니라 내부에 여러 국들이 존재한 복합국사(複合國史)이다.

가야라는 말은 불교적 성격도 강하지만 '삼국지' 동이전에 나오는 구야국(拘邪國)에서 음이 전화(轉化)된 것이다.

가야 제국이 존립하고 있던 4~6세기 당시의 명칭은 중국 사서에는 가라로, '일본서기'에는 임나로 표기되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주로 '가야(加耶)'로 표기되고 있고, 후대의 사서에는 '가야(伽倻)'로 나오는 것이 많은데 이는 불교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가야를 어미(語尾)로 가지는 국명인 대가야(大加耶), 아라가야(阿羅加耶), 성산가야(星山加耶), 금관가야(金官加耶), 소가야(小加耶), 고령가야(古寧加耶), 비화가야(非火加耶) 등은 신라말 고려초의 사회변동기에 성립된 것이다.

가야연맹체의 한 구성체인 대가야의 국명은 시기에 따라 또는 정치적 변화에 따라 바뀌었다.

삼한시대, 고령지역에서 성립된 변한 초기국가의 국명을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반로국(半路國)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반로국은 반파(伴跛), 반파(半波)로도 표기되었다.

이 반로국은 3세기말에서 4세기초에 와서 변한사회가 가야사회로 전환할 때 낙동강 수로 교통의 요충지인 고령군 우곡면 지역과 철 생산이 풍부한 합천군 야로면 지역을 확보하여 그 세력을 확대하였고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국명을 가라로 바꾸었다.

그 후 광개토왕이 신라를 도와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을 공격하면서 임나가라(김해 금관가야)가 큰 타격을 입게 되자 고령의 가라가 연맹체의 새로운 맹주국으로 등장하였다.

지산동의 거대한 고분과 금관.장식대도를 비롯한 화려하고 풍부한 유물이 이를 말해 준다.

이에 고령의 가라는 가야 제국 가운데서도 가장 크고 강한 나라라는 의미로 대가야 또는 상가라를 자칭하였다.

479년 하지왕(荷知王)이 중국의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의 작호를 받은 것도 이러한 성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반면, 초기의 맹주국이었던 금관가야는 이 때 남가라(南加羅) 또는 하가라(下加羅)로 표기된 것에서 보듯 그 위상이 크게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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