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대가야(3)-가라국의 태동

입력 2003-07-28 09:15:42

설화가 귀중한 것은 아름답고 진솔하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입담이 세월을 두고 갖은 양념구실을 하며 때로는 싱겁고 때로는 매운 맛이 얼큰 정도를 넘기기도 하며 쉼없이 전해 내려 온다.

그것이 간혹 위대한 역사를 태동 시키기도 하고 또 그런 역사위에 다른 역사를 포개며 끝간데 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면 비로소 우리는 설화로 하여금 우리의 삶이 얼마나 풍요한가를 깨닫는다.

물론 신화나 전설도 마찬가지다.

가야산에는 이런 설화가 수두룩하다.

정견모주(正見母主). 얼마나 반듯하고 신비롭기까지 한 이름인가. 1천700여년전, 가야산 깊은 골에 살았다는 여신. 성스런 기품과 아름다운 용모, 여기다 착한 마음씨까지 지닌 산신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터전을 닦아 주는게 일과다시피 했다.

밤낮으로 이를 하늘에 빌어 하늘도 감응했음일까. 하늘신 이비가(夷毗訶)가 오색 꽃구름 수레를 타고 가야산 중턱 '상아덤'(일명 가마바위)에 내려 온다.

그리고 둘은 마침내 옥동자를 둘이나 낳는다.

형은 천신을 닮아 해처럼 얼굴이 둥그스럼 불그레 하고 아우는 여신을 닮아 갸름하고 흰 편이다.

이들이 훗날 형은 대가야의 초대왕인 이진아시왕이 되고, 아우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된다는 설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와 감응해 대가야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왕 뇌질청예(惱窒靑裔)를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고 적고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가야의 건국신화가 역사로 태동하는 명장면을 볼 수가 있다.

어머니의 산 가야산이 닦아준 살기 좋은 터전은 과연 어디였을까. 이 산 북쪽과 동쪽에서 발원한 가천과 야천(가야천)을 따라 뒤졌다.

두 하천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100여리를 달려 경북 고령군 고령읍 회천에서 아무 말없이 서로 만나고 있었다.

그 유역. 가야산에서 흘러 내린 물줄기가 흠뻑 적셔 놓은 땅. 대가야 사람들이 논 밭 일구며 정착한 터가 바로 이 회천을 중심으로한 가천과 야천 일대였다.

대구에서 국도를 따라 고령읍내로 들려면 길목인 금산재를 반드시 넘어야 한다.

이 고개를 돌아내려가 금산(적림산)을 배후로 하고 회천을 바라보는 곳에 위치한 고령읍 장기리에 '알터'마을(옛 개진면 양전리)이 있다.

거기에 높이가 3m, 길이는 6m 가까운 바위그림(岩刻畵)이 있다.

대구한의대 김세기 교수(역사관광학)는 "4개의 동심원, 사람 얼굴같은 형상으로 봐 선사시대인들이 이 바위를 제단으로 삼아 태양신에게 풍요를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알터마을과 인접한 개진면 양전리를 비롯해 반운리, 신안리 등 곳곳에는 또 고인돌(支石墓)들이 독특한 거석의 무덤덤한 모습으로 발견되고 있다.

88고속도로 고령 나들목을 빠져나와 야천을 따라 고령읍 방향으로 4㎞쯤 간 지점. 쌍림면 안화리 하천변 야산 기슭에 암반이 나왔고 여기에도 바위그림이 4군데나 새겨져 있었다.

운수면 봉평리 운수우체국앞과 '한다리'마을 논 가운데는 1기씩의 고인돌이, 신간리에는 선돌(立石)이 각각 우뚝 솟아 있었다.

최근 운수우체국앞 고인돌에서는 간돌칼과 간돌화살촉이 발굴돼 사냥 등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또 고령읍 저전리와 쾌빈리에도 고인돌 1기와 민무늬토기가, 낙동강에 인접한 성산면 박곡리 '중리'마을 일대는 고인돌 8기가 나왔다.

청동기시대 삶의 흔적이었다.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약 50만~60만년전 구석기시대. 이후 신석기를 거쳐 기원전 1000년쯤 청동기가 도입됐으며 기원전 100~200년쯤 청동기 세력이 남부지역에서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고 정착생활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조그만 '촌락' 공동체를 형성했고, 잉여생산물의 소유여부에 따라 계급도 생겨났다.

고령에는 개진면 양전리·반운리, 쌍림면 안화·산주리, 운수면 봉평·신간리, 성산면 박곡리, 고령읍 저전·쾌빈리 일대에 촌락이 형성된 것이다.

기원 전후한 무렵, 중국을 통해 철기가 전해지면서 청동기와 철기문화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철기를 가진 집단은 청동기시대 촌락을 통합해 '읍락(邑落)'을 이뤘고, 이중 강력한 세력은 주변 읍락을 정치적으로 묶어 초기국가(부족국가 또는 읍락국가)를 탄생시켰다.

이른바, 소국이었고, 그 중심 읍락이 '국읍(國邑)'이었다.

이 즈음 압록강을 근거로 한반도 북부에는 고구려의 전신인 소국연맹체가, 서북방에는 낙랑, 대방군 등 중국 한나라의 4군이 들어섰다.

남부에는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 마한(54개국), 경북 일원 진한(12개국), 경남 일원 변한(12개국) 등 소국 연맹체가 형성됐다.

이후 마한은 백제국이 통합한 백제로, 진한은 사로국의 신라로 발전했으나 변한은 장기간 통합되지 못한 채 '가야제국'으로 이어졌다.

가야의 모태는 바로 변한이었다.

200년대 전반 당시 변한은 12개 소국이었으며 이중 구야국은 경남 김해, 안야국은 경남 함안, 반로국은 경북 고령, 고자미동국은 경남 고성, 독로국은 부산 동래 등지에 형성됐다.

소국 가운데 큰 나라는 4천~5천가구, 작은 나라는 600~700가구여서 1개 소국은 평균 2천가구인 셈이다.

대가야의 전신인 '반로국(半路國)'은 기원 직후부터 200년대까지 고령군 개진면 양전·반운리 일대를 정치적 중심터(국읍)로 삼았다.

가천과 야천이 맞닿아 남동쪽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기름진 회천 유역이었다.

이 지역에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국읍을 중심으로 주변 가천, 야천, 낙동강 유역과 내륙분지 등 5, 6개 읍락을 아울러 소국을 이룬 것이다.

그러나 고인돌이 가장 많고 나무널무덤(木槨墓)이 발견된 양전·반운리 일대에 이상하게도 4세기 이후 유적·유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반면 고령읍 연조리엔 나무널무덤과 고인돌은 없는 대신 돌널무덤(石槨墓)이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회천을 중심으로 성장하던 반로국이 300년대로 접어들면서 국읍을 주산(321m) 아래 구릉지인 연조리로 옮긴 것이다.

연조리 일대는 동쪽 앞으로 회천과 들판이 펼쳐져 있고, 서쪽 뒤편에 주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정치지배력을 키우고 전쟁 등에 대비하기 위해 회천 유역보다 더 넓고 방어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것이다.

조선시대 '택리지'는 '가야천 유역 고령, 성주, 합천 등은 한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 씨 1말을 뿌리면 120~130말이 나오며 적어도 80말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농업용수가 풍부해 한재를 겪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반로국은 이같은 지리적 이점을 살려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이를 바탕으로 야천을 따라 경남 합천군 야로면, 가야면 일대로 영역을 넓혔다.

또 연조리 인근 내곡리에 요지를 만들어 대가야식 토기 생산에 본격 나섰다.

특히 야로 철산지 확보는 철제품의 생산과 교역으로 이어져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되었다.

고령읍 쾌빈리 나무널무덤에서는 300년대 후반 철제 농기구와 공구, 화살촉 등이 많이 출토돼 4세기대 철기 생산이 본격화됐음을 말해주고 있다.

가천·야천·회천을 기반으로 한 농업생산력, 주산의 방어력, 철기를 통한 무력과 경제력을 고루 갖추게 된 셈이다.

이 때부터 반로국은 단순한 삼한 소국의 단계를 너머 질적 변화를 이룬다.

나라 이름도 '가라국(加羅國)'으로 바꾼다.

바야흐로 대가야가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김인탁기자 kit@imaeil.com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사진·안상호기자 shah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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