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암 아동 환자·부모 돕는 '촛불회'

입력 2003-07-24 15:00:00

'제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처럼 백혈병, 뇌종양 등으로 투병중인 아이들과 그 보호자들을 돕고 있는 '촛불회'. 16년째 대구 시내 병원 등에서 소아암 환아·보호자들을 돕고 있는 제갈기태(회장), 송춘계, 진영희씨 등 47세 동갑내기 회원들 역시 수 년전 백혈병으로 어린 자식을 먼저 가슴에 묻어야 했던 아픔을 안고 있다.

슬픔을 봉사로 승화시킨 강한 어머니들이다.

◇봉사로 승화된 슬픔

지난 19일 오전 11시 영남대 병원 소아병동. 주단점을 운영하는 제갈기태씨와 보험설계사인 송춘계씨가 하루일과가 된 병원봉사에 나섰다.

소아병동을 먼저 들르곤 했지만, 이날은 딱한 아이가 있다며 병원 6층으로 향했다.

이날 첫 '손님'은 어려운 가정형편속에서도 백혈병과 꿋꿋이 싸우고 있는 명선이(14·여)다.

늦은 아침밥을 먹고 있던 명선이가 "병원밥이 맛 없다"며 투정하는 모양이 제갈 회장 눈엔 참 안돼 보였을까. 깨작깨작 밥 숟갈 드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손톱, 발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면 치료에 해롭다고 했잖아. 커서 다 나으면 얼마든지 멋 부릴 수 있는데 왜 말을 안 듣니". 안타까운 마음도 잠시, 제갈 회장의 잔소리가 길어졌다

제깐엔 멋을 부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까까머리를 만지며 "헤헤" 웃는 명선이. 그래도 밥 숟가락은 뜨는 둥 마는 둥. 제갈 회장은 다음달 8~10일 거제도 야유회에 다른 환자·보호자들과 함께 가자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눈이 참 초롱초롱하지요. 똑똑하고 예쁜 아인데…". 4층 소아병동 계단으로 내려가는 제갈회장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지난 번에 정말 고마웠어요". 소아병동 복도에서 동준이(5) 엄마가 촛불회 회원들을 발견하고는 달려와 손을 꼭 잡았다.

며칠전 휴일, 다급하게 혈소판이 필요했던 동준이를 위해 촛불회측에서 혈소판을 제공한 것. 환자가족들이 급할때 의사 다음으로 찾는 이들이 촛불회란다.

그 옆에서 회원들에게 아픈 아이들의 근황을 한참이나 들려주던 강경선 수간호사도 "내 일처럼 환자들을 돕는 분들"이라며 씽긋 웃는다.

소아병동 466호 '격리실'. 회원들이 인사와 함께 문을 열자 엄마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오랜 간호생활로 아이들보다도 지쳐보이는 엄마들.

"처음 아이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얘길 들으면 엄마들은 넋이 나가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점에서 저희가 돕게 돼요". 병원에 입원한 새 환자·보호자에게 일상적인 병원생활부터 장기적인 간호방법, 응급상황시 대처해야할 사항, 재발병을 막기위해 조심해야 할 것 등을 조언하는 것이 촛불회 회원들의 첫 일. 다음은 답답한 심정을 들어주며 엄마들의 곁을 지키는 일이다.

회원들은 백혈병 환자의 경우 2,3년에서 길게는 10년 넘게 투병을 각오해야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엄마가 강해져야 한다고 했다.

2년째 소아암을 앓고 있는 아들(8)을 둔 김옥연(38·여)씨는 "촛불회 어머니들이 우리와 같은 경험을 먼저 겪은 분들이어서인지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큰 위안이 된다"며 "나 같으면 그 큰일을 겪은 뒤에는 병원 뒤도 돌아보기 싫었을 것 같다"고 감사함을 전했다.

◇백혈병 환자가족들의 보금자리

촛불회는 지난 1988년 2월 백혈병 등 소아암을 앓는 아이들의 엄마들이 모여 발족했다.

백혈병으로 아이를 먼저 떠나보냈거나, 힘겨운 투병생활동안 서로 위로하던 11명의 엄마들이 초기멤버. 제갈 회장은 18년전 아들(9)을, 송씨는 딸(4)을, 진씨는 아들(8)을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이젠 회원이 이들 셋밖에 남지 않았지만,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이들을 돕겠다는 초심은 그대로였다.

"지금 병실은 호텔수준이죠. 예전엔 TV, 냉장고, 비디오, 전자레인지 등을 이삿짐처럼 날라야했어요". 촛불회 회원들은 우선 소아병동의 불편한 환경부터 바꿔나갔다.

회비가 모이는대로 병실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씩 구입·기증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백혈병 아동환자 4명을 선정, 월 10만원씩을 보태주고, 수술을 앞둔 아이들에게 50만원씩을 도와주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때 외로운 병실 아이들을 위한 파티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드는 지원비만 1년에 700만~800만원. 후원회비 외 대부분의 지원비는 회원들이 직접 일일호프집 등으로 마련한다고 했다.

백혈병에 대한 오해가 심했던 십 수년전 회원들은 "백혈병은 옮는 병이 아니다"는 전단지를 들고 시내에서 거리캠페인을 벌이기도 했고, 환자들의 의료보험 적용기간을 180일에서 1년으로 늘리게 위해 서명운동도 하는 등 환자가족들의 복지를 위해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회원들은 4년전 대구·경북 소아암협회가 '사랑의 보금자리'(대명동 세광그린타운)를 마련해주면서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게 됐다

32평짜리 보금자리엔 병실생활에 지친 환자·보호자들을 위한 세간살이들이 다 갖춰져 있다.

시외지역에서 병원을 찾는 이들은 이곳에서 피곤함을 달랜다.

엄마들은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음식을 조리해 가기도 하고, 촛불회 회원들이 담근 김치를 나눠먹기도 한다는 것.

"백혈병도 초기에 발견하면 얼마든지 나을 수 있어요. 지금은 힘들겠지만 아이에겐 엄마가 가장 큰 믿음을 줘야해요". 촛불회는 오늘도 이 사회에 작지만 소중한 희망을 던지고 있다.

최병고기자 cbg@i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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