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와 용서...애틋한 가족사랑

입력 2003-07-14 09:15:26

"아버지, 저에게 혹독하게 '공부를 못하도록 말리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말리시지 않으셨다면 저는 시골에서 농사짓고 필부필녀(匹夫匹女)나 장삼이사(張三李四)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말리셨기 때문에 공부가 재미(?)있었고 끝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젊어서 고생은 돈을 주고 사서라도 한다하지 않습니까. 저는 고생이라 표현하지 않겠습니다.

감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어린시절 한사코 공부를 말리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는 이영백(54.영남이공대 기획홍보과장)씨. 10형제의 막내로 태어나 귀여움은 커녕 공부하는 것을 마땅찮아 하신 아버지의 독특한 철학 때문에 숱한 번민을 했다는 이씨의 편지사연 중 일부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돌이켜보면 공부를 많이하면 조직속에서 권모술수를 부리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이윤에 눈이 멀어짐을 경계하지 못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고 이씨는 적고 있다.

최우수상을 받은 이 편지 말고도 대구시여성단체협의회(회장 배근희)가 지난 5월 한달간 실시한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 공모전'에는 100여통의 사연이 날아들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뒤늦은 후회, 사위로서 장인장모에게 다짐하는 약속,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깊은 속마음을 헤아리는 글을 비롯해 엄마에 대한 딸의 그리움과 염려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속마음을 이렇게 편지글로라도 보여드리고 싶다며 저마다 소중히 간직한 사연들을 꺼내 놓았다.

18년동안 모시고 병수발하던 구순의 시어머니를 마지막 임종무렵 큰댁으로 보낸 막내 며느리 윤미화(43.대구시 달서구 신당동)씨의 사연은 가슴저미는 후회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무리 애써 돌봐드리고 묵묵히 지켜봐 드려도 항시 옳다고 칭찬 한번 안해주시고 못마땅히 여기시던 어머님. 저요, 속앓이 한번 안했다하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렇게 속상하고 원망스럽던 당신이었는데, 이제 먼나라에 가시고 안계신 당신 빈자리에 철부지 며느리는 마냥 좋고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가슴 한곳이 허전하고 씁쓰레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장농정리 하면서 미처 챙겨드리지 못한 속바지 껴안고 죄많은 막내며느리 또 울어봅니다.

조금만 참을걸, 조금만 참아볼 것을…".

곧 다가오는 어버이날 산소를 찾겠다며 쓴 윤씨의 사연은 군데군데 눈물이 얼룩진 듯하다.

위로 두동서가 있어도 결혼 후 줄곧 모시며 미운정 고운정이 흠뻑 들었다는 윤씨의 사연은 가슴에 못다한 사랑합니다는 말로 용서를 구한다.

청도에 계시는 부모 두분 중 특히 어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워 편지를 쓴다는 장경화(48.대구시 수성구 수성3가)씨의 '귀로 읽는 편지'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어머니 연세 칠순, 도시같으면 경로당에서 편히 쉬시련만…. 농사꾼이다 보니 복숭아 농사, 논농사, 밭농사 등 머슴처럼 새벽부터 밤늦도록 허리 펴실 날이 없습니다.

지면으로 처음 불러보는 다정다감한 어머니. 어머니께서 까막눈이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목이 메어 오고 절절히 가슴 저미게 불러 보진 않았을 것입니다.

십여년전쯤 남동생이 군대가서 첫 편지가 왔는데 읽어줄 사람이 없어 혼자서 편지를 가슴에 부둥켜 안고 눈물만 흘렸다 하셨지요. 제가 공무원 생활을 하던 시절 글을 모르는 시골 노인 분들이 오면 아무리 바빠도 한번도 대서소로 보내지 않고 무료 대서해 드린 것도 엄마의 뒷모습을 보는 듯해서입니다".

이 편지를 오는 가을 어머니의 칠순잔치 생일날 가족.친지 앞에서 큰소리로 읽어드리겠다는 장씨는 비록 글자를 몰라 남보다 모자라고 부족해도 지혜롭고 자애로운 엄마였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다고 했다.

맏며느리의 모자람을 다 이해해 주시는걸 요즘들어 다시 실감하며 편지를 쓴다는 이정옥(대구시 수성구 시지동)씨는 시아버지의 사랑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에미야, 이거 토종밤이다.

맛이 좋다 하시며 제 앞치마에 담아주시기도 하고 자반고등어 껍질만 벗겨드시고는 고기는 퍽퍽해서 맛이 없다며 제 밥그릇 앞으로 밀어주시던 자상함에 목이 멥니다.

아버님께 딸이 되리라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아 늘 아버님의 뒤에서 서성이기만 하는 못난 며느리이지만 남편에게 도움을 주는 아내, 수고로 자식을 키우는 엄마가 되겠습니다".

편지 공모전 심사를 맡은 최해남(대구시 청소년과장.수필가)씨는 "핵가족화 추세가 확산되면서 전통적 효 개념이 퇴색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번 공모전에서 드러나듯이 효와 가족사랑은 여전히 우리를 엮어주는 끈끈한 매개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심사평을 전했다.

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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