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가정.기술시간 만세

입력 2003-06-30 15: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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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인 아들 녀석이 가정 시간에 하는 수행 평가를 준비한다고 집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야채 써는 연습에 열중이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와 비교하면 상상하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남학생이 앞치마 입고 가사 숙제라니.

영어나 수학 공부할 때는 온갖 인상을 쓰며 마지못해 하던 녀석은 불만은 커녕 가사 실습을 너무나 재미있어 한다.

이쯤 되면 '요즈음 사내아이들 너무 유약해. 큰일이야'하고 한탄할 남자 독자들이 있으리라. 그러나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

지금은 가정.기술이 한 과목으로 통합됐지만 예전에는 여학생에게는 가정 시간, 남학생에게는 기술 시간만이 주어졌다.

여학생은 '착하고 아름다운 현모양처가 되자'는 교훈 아래 수놓기, 블라우스 만들기, 요리 실습 등을 했다.

반면 남학생은 '미래를 이끌 동량이 되자'는 교훈 아래 기계 작동법과 공구 다루기 등을 배웠다.

원래 두드리고 고치는 일에 둔감하기도 하지만 학교에서 기술 관련 기초를 배운 적이 없어 나는 사소한 못질도, 화장실 변기 고장도 무조건 남편이 와서 해결하기를 기다린다.

남편은 이를 꼬투리 삼아 여자를 무시하는 말투를 내뱉고 그럴 때마다 부부 싸움이 일어난다.

남편도 마찬가지. 가정 시간에 가사 실습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어 사소한 셔츠 단추를 달 때나, 다림질이 필요할 때면 평소와는 달리 내 눈치를 살피고 은근 슬쩍 나에게 옷가지를 내민다.

여학생이나 남학생이 똑같이 공구 다루는 법을 미리 배웠더라면, 그리고 바느질과 살림살이에 대해 미리 실습을 해 보았더라면 이런 소극은 일어나지 않을 텐데. 성차별 교육의 부작용이다.

나는 요즘 명절이 되면 아이들에게 송편 만들기를 시킨다.

평소에 축구, 농구를 즐기는 거친 사내아이들이지만 좋아라 하며 열심히 송편을 만든다.

아이들은 맛있는 송편을 먹기 위해서는 재미도 있지만 허리도 쑤시고 등도 아프다는 사실을 알고 평소에 할머니와 엄마가 하는 수고를 몸으로 직접 느낀다.

어려서 관심을 가진 것이나 경험한 것은 평생 잘 하게 된다고 하지 않는가. 남편과는 달리 아들 녀석만은 어릴 때부터 남녀의 일을 구분하지 않고 다양하게 체험해 봄으로써 여성을 보다 잘 이해하고, 성차별을 벗어난 유연한 사고를 가진 멋진 신사가 되기를 기대한다.

허정애 상주대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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