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건씨 한국의 성씨와 족보

입력 2003-06-26 09:45:39

혈연과 지연을 강조하는 우리의 뿌리 의식은 '족보'로 대표되는 성씨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족보나 성씨가 상당부분 왜곡돼 있다면(?).

30여년동안 한국 성씨 연구에 매달려온 이수건 박사(69·영남대 사학과 명예교수·사진)는 최근 펴낸 신간 '한국의 성씨와 족보'를 통해 이같은 가정을 구체적 물증을 통해 사실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서울대 출판부가 펴내고 있는 '한국의 탐구' 25번째 기획물.

성씨 연구에 있어 탁월한 업적을 인정받는 이 박사는 책을 통해 일반화된 성씨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을 강하게 거부한다.

그는 "한국의 성은 대부분 중국과 관계도 없으며 발생 과정도 판이하게 다르지만 중국과 동일시 하는 것이 잘못된 출발의 시작"이라고 밝혔다.

이 박사는 신라시대 박·김·최·정·손씨 등 9개성과 왕실성을 제외하면 대다수 성은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으며 몇몇 특수성을 제외하면 동성의 이본(異本)은 다른성과 같다고 강조한다.

그는 "조선초인 16세기 인구의 40%가 무성층이고 17세기까지 양반층은 10%에 그쳤다"며 "일부다처제 하에서 배출된 수많은 서얼들의 향방을 고려할때 문벌과 반상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양반의식에서 나왔다"고 밝혔다.

이 박사는 '한국의 성씨와 족보'를 통해 200여개를 넘는 성씨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으며 또 그 왜곡 과정을 세종실록지리지의 '실지' 등 문헌 연구를 통해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다.

한국 성씨가 거친 왜곡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조선조 뿌리를 내린 '유교'의 영향을 우선 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

"조선시대 역성혁명을 이룬 양반사대부의 대다수는 고려때 향리출신들이며 이들은 문벌의식과 신분적 특권을 강조하기 위해 족보 편찬때마다 향리 관련 자료를 폐기하고 조상과 본을 바꾸는 행위를 거듭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후손 또는 신흥세력들이 족보편찬에서 본관을 바꾸거나 가계를 조작하는 일이 심해졌다는 것.

이 박사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성리학에 경도되어 선조때 만들어진 족보에 대해 진위 문제를 따지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 비판의식도 이러한 성씨 왜곡에 한몫을 했다"고 덧붙였다.

현재 조사된 우리의 성씨는 274개에 본관은 3천435개 정도. 한자성의 종주국인 중국의 2천568성과 10만여개가 넘는 일본에 비해서는 적은 수다.

최초의 전국적인 성씨 자료인 조선초 '실지'와 '여지'에 나타난 성씨가 250여개 안팎인 것을 보면 조선조를 거치면서 성씨 자체는 큰 변화가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박사는 "1909년 민적법이 생기면서 비로소 전 국민이 성을 갖게 되었으며 당시 호적담당 서기가 한자의 획을 잘못 그으면서 생긴 희성과 본관도 있을 정도"라고 밝혔다.

이재협기자 ljh2000@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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