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엔 '작은 거인' 왜소증 장애인 배조규씨

입력 2003-05-28 11:56:54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힘든 일을 많이도 겪었지만 세상은 그래도 살만한 곳이라 생각합니다".

키가 130㎝ 남짓한 2급 왜소증 장애인 배조규(49·대구 산격동)씨의 인생 이야기는 멀쩡한 육신을 갖고도 쉽게 좌절하는 나약한 사람들을 질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7세 때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됐다.

몸이 그러면서도 14세 때 불우한 가정을 떠나 무작정 상경했다.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장애아. 구두닦기를 배우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했지만 돈 한푼 받지 못했다.

그저 잠자리와 한끼 밥이 대가의 전부.

그렁저렁 살면서 결혼을 한 뒤 대구로 되돌아 왔다.

동대구로 한 빌딩 옆에 구두닦이를 '개업'했다.

그게 19년 전. 딸아이를 하나 둬 그 커 가는 모습 보는 재미로 살았다.

하지만 세상은 부부를 배신했다.

보증 서 줬던 두 친구가 발길을 끊고는 돈을 갚지 않았다.

"설마 몸이 이런 나를 이용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얼마나 사무쳤는지 배씨의 눈이 다시 붉어졌다.

매일 같이 거듭되는 빚 독촉에 술로 시름을 달래야 했다.

죽자며 몸부림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또하나의 배신이 그를 흔들고 지나갔다.

빚을 갚아 나가야 하는 어려운 살림에도 배씨는 8년간 한 소녀가장을 후원했다.

그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매월 5만원씩 꼬박꼬박 보내고 명절에는 쌀이나 고기를 갖다 주기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기에 돈 부치기를 중단하자 아이는 발걸음 한번 전화 한 통 없이 정을 끊었다.

"정말 서운했습니다.

마음을 너무 다쳐 더 이상은...".

남의 빚 덮어쓴 일 못잖게 충격적이었는지 배씨는 말을 잇지 못했다.

배씨의 한달 수입은 겨우 40만, 50만원. 매달 15만원 가량의 영구임대 아파트 임차료·관리비를 내고 나면 생활비에도 빠듯하다.

정부 지원금이 그나마 큰 힘. 그런 형편인데도 돈을 떼 보냈다가 외면당하고 말았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싶었다.

배씨 부부는 지금 8세 난 늦둥이 아들, 골다공증으로 불편한 장모와 함께 산다.

본인 살기도 어려운데 장모 모시기가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돌아 온 대답은 명확했다.

"장모님은 우리 집이 편하다고 하시지요".

배씨 가족으로 하여금 험한 세상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 그 어려움 속에서도 남을 도와가며 살게 만드는 힘은 부부의 상호 존중과 사랑인 것 같았다.

"남들은 생활고가 닥치면 가정이 파탄난다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 남편은 영원한 내 짝이지요. 짝을 버리고 어떻게 살겠습니까?" 애정 어린 눈빛으로 남편을 바라보는 부인 이경희(41)씨 역시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다.

배씨를 보증 빚 사건의 절망에서 구한 것도 가족애였다.

뒤늦게 일이 터진 걸 알게 된 아내는 남편을 다독이고 아이를 위해 모아뒀던 적금을 깼다.

조금씩 빚을 갚아나가기 벌써 10년째. 다음달이면 그 지긋지긋한 빚더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배씨의 얼굴에서는 기쁨이 빛났다.

"우리가 사는 영구임대 아파트 사람들 중에는 자포자기해 일을 않고 술로 지새우는 사람들이 적잖습니다.

나는 몸이 불편하지만 그 사람들은 정신이 불편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일할 수 있다는 것만도 너무 즐겁고 감사합니다". 배씨는 "내가 가진 장애나 현실 때문에 세상을 비관하지 않는다"고 했다.

"만석꾼에게는 만 가지 걱정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라고도 했다.

그리고 배씨는 일년 전부터 또다시 대구 북구장애인협회에 매달 4만원씩 후원하기 시작했다.

배신이 거듭될지라도 사람에 대한 믿음을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사회1부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