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가장 최초의 기억이 무엇인지를 묻는 습관이 있다.
대개는 사건의 문맥으로부터 벗어난 기억의 편린들에서 나는 그 사람의 가장 내밀한 운명을 읽어본다.
어떤 관념에도 물들지 않은 시절에 자신의 본성으로 기억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자신에게 가장 합당한 길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그는 과연 자신의 앞에 미리 마련된 그 길을 온 것일까?
내게 그 기억은 마당에 진 감꽃과 그 위로 내리던 빗방울이다.
아마 이른 아침이었던 것 같은 그 순간은 '삐이걱'하고 열리면서 길 위로 내 어린 발을 딛게 했을 것이다.
길은 다시 어머니의 가윗밥으로 생긴 천 조각들을 한없이 만지작거리고 그것을 몹시 소중히 간직하던 아이에게로, 화집을 끼고 있던 몽상적인 여학생에게로 이어진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 기억의 조각들이 얼마나 강렬한 삶의 動因인지.
그렇지만 나의 가족들은 내가 그렇게 자랐다는 것을 잘 모른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시절에는 아이들이 그렇게 홀로 자신만의 방을 가지고 자랐던 것 같다.
시간은 충분했었다.
한 시절을 그냥 몽상으로 보낼 수도, 공부를 작파하고 지낼 수도 있었다.
그 시간에 아이들의 내밀한 방은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객관화될 수 없는 크기와 모양으로 자라 준 것이 아닌지….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는 이 늦은 시간에도 집에 오지 않는다.
아마 낮에 함께 공부했던 내 학생들도 지금 학교에 있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하루에 열 일곱 시간을 입시 경쟁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방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 것인지. 어느 때보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시대의 이 아이들은 어쩐지 가난했던 우리보다 더 지쳐 있는 듯하다.
졸고 있는 아이들을 깨우면서 나는 참 갑갑하다.
우리는 아이들을 자신 앞에 놓인 삶의 길을 바라볼 기회를 박탈하고 오직 조금 덜 실수하는 평균적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우리 모두는 고유한 존재이며, 그러므로 우리 삶의 내밀한 방 또한 고유해야 하지 않겠는가.
조미향 경신고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