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포럼-전쟁나면 도망가라?

입력 2003-05-27 09:52:49

금년은 6·25전쟁이 종전된 지 50년, 베트남전쟁 한국 파병군이 철수한 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데 6·25전쟁이 종결되면서 5만명 이상의 한국군 포로가 북한에 억류되었고, 8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납북되었다는 사실을 주지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더욱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한국군과 당시에 베트남에서 근무했던 민간인들 중에서 상당한 수가 베트콩 민병대나 월맹군에 잡혀 북한으로 이송된 뒤에 아직까지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서울 국립묘지 위폐봉안관에 게시된 6·25전쟁시 한국군 실종자 102,384명 중에서 80,000여 명은 포로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의 자료를 비교해 보면 운동전 시기의 실종자 80%, 진지전 시기의 실종자 60%가 포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포로들 중에 적지 않은 수가 위험한 전시 복구작업에서, 혹은 생체실험을 포함한 각종 비인도적 학대로 희생되었어도 50,000∼60,000명은 종전 시에 생존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6 25전쟁 당시, 1953년 제2차 조사 통계에 따르면, 84,532명의 민간인이 납북되었다.

한국정부는, 한국군이 공세작전이나 확인정찰을 주로 담당했기 때문에 실종자가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6명의 실종자만 인정하지 포로의 존재는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8년 6개월(1964. 9. - 1973. 3·) 동안 325,517명의 한국군 장교와 사병들이 577,487회의 각종 작전에 참가했다.

그중에는 안케패스 전투나 짜빈동 전투와 같은 큰 전투도 있었다.

그리고 베트남 남부 밀림과 농촌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맞서 한국군이 전투를 하다가 낙오되면 돌아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정부의 부정과는 달리, 미국 국방부의 1996년도 연구보고서 '국방부 포로/실종자 사무소 문서(Defense Prisoner of War/Missing in Action Office Reference Document)'에 수록된 조준분 등은 포로가 되어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6·25전쟁 당시의 납북자들을 송환시키기 위해 한국정부는, 1951년 12월부터 1957년 11월까지, 정전협상과정에서 그리고 전후(戰後)에는 정전협정에 근거한 '실향사민(失鄕私民)'의 이름으로 몇 차례 노력하였으나, 그 후에는 자포자기상태에 빠져 버렸다.

그리고 최근까지도 한국정부는, 이들에 대해서 전쟁이라는 당시의 상황과 납북과 월북의 객관적 평가의 어려움, 그리고 50여 년이라는 세월의 경과를 이유로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의 납북자 가족들이 모임을 결성한 후, 전쟁 당시에 정부가 작성한 납북자 명부를 발견하였다.

이와 같은 객관적 자료의 발굴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당시 상황에 대한 판단근거 부족과 북한이 납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다는 현실적 이유를 제시하면서 넓은 의미의 이산가족으로서 생사확인과 서신교환, 그리고 제한적인 상봉에 대한 노력만을 기울이고 있다.

전쟁포로의 억류와 민간인 납북자 문제에 대해 한국정부가 이렇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북한의 기존입장을 변경시키도록 강제하거나 유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과 화해·협력 관계를 유지하려는 대북정책과 상충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한국정부가 노력하지 않으면 북한의 입장변경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고, 오히려 북한의 입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현재와 같이 북한에 대해 많은 지원을 해주고 대화의 기회도 많으면서 이 문제들에 대해 한국정부가 침묵을 지킨다면 한국정부는 자국민에 대한 보호의무를 저버리는 것이 되고, 조국이 위기에 처하면 일신의 보존을 위해 도망가라고 권하는 것이 된다.

허만호(경북대교수 정치외교학)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