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속 자리 꽉찬 일요일 대학도서관

입력 2003-05-21 11:39:38

일요일이던 지난 18일 오전 경북대.영남대 도서관. 올해의 봄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며 사람들을 밖으로 불러내고 있었지만, 대학 도서관들은 오전 10시쯤에 이미 만원을 이뤘다.

취업을 염원하는 예비 졸업생들과 졸업자들로 가득한 그곳에서는 공기마저 지치고 무거워 보였다.

막 20세 되는 젊은이들이 이를 기념하고 있던 뒤안에서 그 선배들은 힘든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거운 일요일 '묻지마 지원'

"백수한테 휴일이 무슨 소용입니까? 집에서 눈치보느니 도서관 오는 게 낫지요".

오전 9시쯤 영남대 도서관 앞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던 김모(27)씨가 쓴웃음을 지었다.

올해 초 대학을 졸업했다는 김씨는 20여개 회사에 원서를 냈으나 서류전형이나마 통과한 곳은 3, 4군데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4년제 대학을 나왔지만 면접에서 전문대 졸업생에게 밀리는 경우마저 허다합니다.

현장에 맞는 교육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작은 회사라도 들어가라는 부모님의 성화… 적성 따위를 포기한 건 이미 오래라고 했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 나와 문 닫는 시간에야 집으로 향하지만 마음이 늘 무겁다고 했다.

4학년 재학 중이라는 김모(27)씨는 투자상담사, 판매관리사, 컴퓨터활용능력 1급 등 유력한 자격증을 가졌지만 토익 점수에 걸려 원서조차 내보지 못했다고 했다.

"힘들여 딴 자격증이 무용지물될까 봐 걱정"이라는 김씨도 "백수로 졸업하기는 싫다"며 "일단 아무 회사라도 들어가고 볼 것"이라고 했다.

경북대 도서관에서 만난 졸업생 정모(27.대구 상동)씨는 교회 주일 아침예배를 마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왔다고 했다.

토익 800점에 평점 3.5. 그러나 2001년8월 졸업 후 2년여 동안 직장은 구경도 못했다고 했다.

같은 과 친구 졸업생들 중에서도 경찰관 및 교직원 취업자 2명이 직장을 잡은 전부. 나머지는 아르바이트나 과외지도를 하면서 취직을 준비한다고 했다.

정씨는 "이젠 무차별적으로 원서를 넣어 어디라도 취직하고 싶다"며 "턱없이 눈높이를 낮춰야 하는 것이 가장 서글프다"고 했다.

◇실패한 묻지마 뛰쳐나온 재수생들

그러나 도서관 곳곳에는 묻지마 취업에서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취업 재수생들이 책을 펴 들고 있었다.

이들은 거의가 기업체 취업에 실망한 나머지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고 있다고 했다.

2년 전 영남대를 졸업했다는 강모(29)씨는 몇개 회사에 취직한 적 있었지만 적성에 안맞아 곧 그만뒀다고 했다.

"경기가 좀 나아지면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는 생각으로 아무 곳에나 입사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직장을 떠나오고 있습니다.

무조건 눈높이를 낮춘다고 되는 게 아닙디다".

경북대에서 만난 김모(31)씨도 2년 전 대학 졸업 후 작은 토목회사에 들어 갔다가 그만두고 지금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자기 계발할 시간과 여유가 있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김씨는 "현재로선 공무원 시험밖에 탈출구가 없다"며 7급, 9급을 따지지 않는다고 했다.

삼수 끝에 경북대에 입학했었다는 정모(30)씨도 졸업하자마자 건설회사에 입사했다가 2년만에 그만뒀다고 했다.

"취업이 어려운 시기라곤 하지만 쉬는 날 없이 일해야 하는 빡빡한 회사생활에서는 도저히 미래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열심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안정된 직장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여자 졸업자들 중에서는 공무원 시험 준비자가 더 많았다.

학점이나 토익 성적이 우수해도 남자보다 기업체 취업이 더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회사 취직을 포기하고 공무원 9급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경북대 졸업자 강모(24.여)씨는 서류 전형조차 통과하기 어려운 회사보다는 공무원 시험의 문이 좀더 넓어 보인다고 했다.

일년 넘게 휴학까지 하면서 공무원 시험에 매달려 왔다는 영남대생 오모(25.여)씨는 자신처럼 취업 준비를 위해 휴학하고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여학생이 상당수라고 했다.

◇뜻을 꺾인 젊음들

그러나 경북대 졸업자 강씨는 "적성과 관계 없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공무원 시험에 매달려야 하는 현실이 답답하다"며 "차라리 내가 고졸이었다면 이런 걱정은 않아도 됐을텐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영남대생 오씨는 친구들 중에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학습지.학원 강사를 하는 이들도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친구가 드물다며,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이 좀 더 쉬울 듯해 보이는 고향 대전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경북대에서 만났던 정씨(27)는 "졸업 전에는 인라인 스케이트 타기를 좋아했지만 지금은 생각도 못낸다"고 했고, 또다른 정모(30)씨는 "돈이 없어 밥도 1천400원짜리가 아닌 1천100원짜리를 먹는다"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명절이 가장 싫다"고 했다.

결혼도 준비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에 김모(31)씨는 "엄두도 못낼 일"이라며 먼저 직장부터 잡아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다.

배모(29)씨는 "3년간 사귀던 여자친구와 일년 전 헤어진 것이 차라리 잘됐다 싶다"며 "지금은 여자친구가 없는 게 오히려 홀가분하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사회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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