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칼럼-속담은 시다

입력 2003-05-13 11:46:59

모든 속담은 다 시라고 한다.

속담은 거의가 비유로 돼있기 때문이다.

비유란 시의 수사법이다.

시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비유는 시에서는 필수적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라는 속담은 터무니없이 (아무 근거도 없이) 소문은 나지 않는다는 비유다.

이 경우 직설적으로 (직접적으로) 말했다고 하면 그것은 산문이 된다.

그래서 산문의 문장을 친술(Statement) 이라고 하지 않는가? 시에서는 요즘 많이 유행하고 있듯이 시전체가 비유로 돼있는 경우도 있다.

즉 환유 말이다.

미국의 50년대 비평가들인 신비평가들(분석비평가들)은 시는 파라독스의 언어라는 말을 하고 있다.

배배 꼬인 논리를 시에서는 쓴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형식논리로 논리를 일목요연하게 전개해 가지 않고 뒤틀어 놓는가? 호사취미로 그러는 것일까? 아니다.

시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압축된 문장 속에 많은 내용(함축된 내용)을 담으려고 하면 그런 방법을 쓸 수밖에는 없다.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시에서는 또 외연(外延)과 내포(內包)가 밀도있는 긴장관계를 유지할수록 돋보인다.

산문에서는 외연과 내포의 구별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니까 함축성이 약하고 내용이 평면적으로 전달될 수밖에는 없다.

시의 이런 따위 특성을 잘 살린 경우를 오히려 어떤 일부 사람들은 기어(綺語)라는 호칭으로 독자를 현혹케 한다고 배척한다.

시를 산문과 구별 못하는 처사다.

그런 생각을 시에서는 정직이라고 하지 않는다.

시의 정직성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시의 속성을 잘 살리는 것이 (살리려고 하는 것이) 시에서의 정직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경직된 어설픈 생각을 함부로 휘두르지 말 일이다.

아까 내가 예로 든 '아니땐 굴뚝…' 란 속담이 진실이 아닌 경우도 물론 현실에는 얼마든지 있다.

남을 상처내기 위하여 일부로 꾸며서 어떤 말들을 퍼뜨리는 고얀 심보도 있다.

대한민국의 정치마당에서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두말할 나위없이 비열한 짓거리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가 않다.

비열보다도 지는 것, 패배를 훨씬 더 두려워하는 집단이 있다.

이 경우는 시의 비유성을 역이용한 셈이다.

세상을 시를 살 듯이 사는 사람, 아니 시를 살 듯이 살려고 하는 사람과 산문을 살 듯이 살려는 사람이 있다.

남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열중하고 집착하면서 그러는 장본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인 소득을 올리고 있다.

시를 쓴다는 행위도 일종의 그런 것에 속하리라. 시가 무슨 실리를 가져다 줄 것인가? 그런가 하면 심리적인 그런 까다로운 굴절 없이도 직선적으로 현실에 바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다.

정치나 경제에 관여하는 사람이 그런 부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가치를 따지고 있지 않다.

다만 그런 구분을 해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겨레가 많은 속담, 그것도 아주 기발한 속담들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겨레는 시적 감각이 예민하고 풍부했다고 해야 하리라. 외연과 내포를 가진 그것의 긴장상태를 유지할 줄 아는 생활패턴을 (선조가 남겨준) 우리는 소중히 간직해야 하겠다.

내 시의 몇 구절도 속담이 되어 후손들의 생활 속에 용해됐으면 얼마나 흐뭇할까 하고 생각해본다.

속담으로 남을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인으로서의 최상의 보람이랄 수 있으리라.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속담이 있다.

가치가 전도된 현상을 말함이다.

기대를 가지고 가봤는데 막상 가보니 전연 기대 밖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실망을 나타내는 그런 속담이기도 하다.

이럴 때 리얼리즘은 화를 낸다.

화를 내며 대든다.

싸움을 건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현상은 심리현상이다.

현실에는 이런 일이 없다.

이 현상을 속담은 웃음으로 넘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현실(예상 밖의)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속담은 그러니까 초월적이고 너그럽다.

시도 원래가 그런 것이다.

앞으로도 더 많은 신선한 속담들이 생산돼 나와야 하겠다.

김춘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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