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옥입니다-청보리

입력 2003-05-13 09:44:25

청보리의 계절이다.

보리밭마다 새파란 이삭들이 초여름 같은 햇살에 알곡을 살찌우고 있다.

겨우내 텅 빈 들녘에서 저혼자 새파랗게 살아있더니 어느새 수확기가 그리 멀지 않다.

청보리를 보면 제각각의 이미지가 한꺼번에 달려온다.

농민들의 가난과 서러움을 전통적인 서정성으로 살려냈던 시인 임홍재(1942-1979)는 시 '청보리의 노래 1'에서 '…아이들아 아이들아 청보리를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돋아나는 청보리를 밟아라…'고 노래했다.

밟을수록 일어나는 민초의 힘은 확실히 청보리와 닮았다.

청보리는 또한 고독과 향수를 전해준다.

천형의 시인 한하운(1919~1975)의 시처럼 '필-ㄹ 닐니리' 보리피리 소리는 형언못할 깊은 비애와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5월의 청보리는 청춘 그 자체이다.

꼿꼿한 대궁과 짙푸른 이파리, 빳빳한 이삭에서 뿜어내는 녹색의 에너지는 보기만 해도 싱그럽다.

길다란 까스라기를 곧추세운 모습은 장난꾸러기 소년이 수염을 단 것 같아 웃음을 머금게 한다.

까마득한 옛 추억이 돼버렸지만 지난 60년대만 해도 이 무렵은 민초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시기였다.

긴 춘궁기에 주린 배를 달래며 허덕허덕 넘어야 했던 보릿고개. 오죽했으면 산과 들의 풀뿌리와 나무껍질이 남아나지 않았을까.

그래선지 남녀노소간 음식층하가 심했던 그 시절, 특히 며느리는 밥 순위가 꼴찌였다.

'입병난 며느리는 써도 눈병난 며느리는 못쓴다'는 옛말은 보릿고개 시절 며느리의 설움을 잘 말해준다.

보리이삭이 통통해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누렇게 뜬 얼굴에도 조금씩 핏기가 돌았다.

하굣길의 개구장이들은 긴 봄날 오후 심심한 입을 달래느라 보리서리를 했다.

길가 보리밭의 이삭을 불에 그슬려 두 손으로 비벼 한줌씩 털어넣고 꾹꾹 씹으면 달큰한 물이 배어나왔다.

이제, 보릿고개는 전설이 돼버렸다.

아이들은 '밥이 없으면 빵 먹으면 되지…'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고, 가난한 이들이 목빠지게 기다렸던 청보리 이삭은 꽃꽂이 소재로서 화병에 꽂혀 있다.

청보리를 보며 시류의 변화를 실감한다.

그러면서도 또한 변하지 않은 것이 있음을 본다.

얼어붙은 땅에서도 깊이 뿌리내린 보리는 살아남는다는 것, 많이 밟힐수록 튼튼한 알곡을 맺는다는 사실,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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